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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을 자주 바꿨다는 건














명함을 새로 만들었다. 크기가 손바닥보다 크고, 세 번 접는다. 접은 것을 다 펴면 길이는 A4 종이의 긴 변 만하다. 명함 안에는 사진을 인쇄했다. 내가 찍은 포트레이트 사진 몇 장, 패션 사진 몇 장을 실어서 내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고 알려줄 수 있도록 했다. 또 QR 코드도 넣어서 명함에 실리지 않은 다른 사진들도 볼 수 있도록 했다. 나는 내 사진을 파는 데 서투니까, 명함이라도 이렇게 만들면 말 몇 마디 대신 한 번이라도 사진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결정했다. 우선 100장만 만들어서 다 쓰고, 아쉬운 부분을 수정하고 새로운 사진들로 바꿔가며 계속 만들 작정이다.








기억하는, 제대로 만든 첫 명함은 상하이에 와서 사진을 직업으로 삼으면서 만들었던 것이다. 짙은 회색의 얇은 코팅지를 썼고, 말라 죽어서 땅바닥의 갈라짐을 몸 위에 새겨놓은 숭어 한 마리의 사진이 있었다. 뒷면에는 for gogh 로고를 넣었다. 그러니까, 15년쯤 전이다. 이 명함을 얼마나 오래 썼는 지는 모르겠다. 받아든 사람들은 나름 특이하다며 반겨주었다. 물고기 명함은 우연찮게도 수주허苏州河 강변 작업실에 사는 동안 썼다. 스티로폼 바닥에 깔고 담요 덥고 잠을 잤던 그곳에서는 커다란 창문을 열면 바로 앞으로 누런 강이 흘렀는데, 나는 명함에 있는 물고기를 수 백 배쯤 확대한 거대한 물고기가 저 누런 강물 아래로 헤엄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꽤 자주 진지하게 했다. 내 물고기 사진을 아주 크게 인쇄해서 작업실 바깥 벽에 걸면, 아주 멀리서도 이 물고기를 볼 수 있겠구나 생각도 했다. 돈이 없어서, 못 했다.



끈적끈적한 탁한 붉은색을 좋아하게 되면서 명함에도 꼭 한 글자 정도는 와인레드 컬러를 썼다. 강변 작업실을 말아먹고 사는 동안, 잠시 여행잡지를 만들겠다고 한국과 중국을 오가던 동안 명함은 점점 단순해졌지만 핏빛같은 붉은 색을 꼭 조금씩 남겨 두었다. 명함은, 자주 바꿨다. 주소가 바뀌기도 했고, 직업이 바뀌기도 했다. 최근에는 작년에 잠시 열올리다가 관둔 직업 글쟁이 명함도 있다. 그 명함 받아들던 날, ‘이번 명함은 참 오래 쓸 것 같아요.’했던 말이 무색하게 일은 6개월 만에 끝났다. 서랍에 남은, 다 못 쓴 명함들은 불편한 마음으로 하나씩 찢어 버렸다. 회사생활이 아닌 내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명함을 자주 바꿨다는 건 아마도 방황했다는 뜻일 거다.




건축전시회에 갔다가 재밌는 명함을 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명함과 다를 게 없는데 두께가 상당했다. 명함 안에는 A3 사이즈의 종이가 아주 여러 번 접혀 있었다. 일반 명함 용지 두 장을 앞뒤로 삼아서 기본적인 명함 정보를 담고, 사이에 들어가는 종이를 모두 펴면 건축사무소의 포트폴리오 이미지들이 펼쳐지는 형태였다. 오, 인상적이다! 이런 식이면 나도 내 포트폴리오 명함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곰곰히 따져보고 관뒀다. 우선 접힌 면이 완벽하고 앞뒤 명함 종이의 네 귀가 딱 맞아들어가는 이런 완성도를 쉽게 구현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 사진 한 장이 너무 많이 접히면 보기 안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몇 번 수정한 끝에 지금 형태의 명함으로 결정했다.




명함에 내가 글쓰는 사람인 걸 꼭 넣으라는 말은 아내의 생각이었다. 낯뜨겁게 쓰기는 뭣해서, 인터뷰어.라고 썼다. 그리고 텍스트를 조밀하게 배치해서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했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붉은 색을 조금 넣었다.










새로 만든 명함은 일반적인 명함 사이즈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정도 규격화된 것도 아니다. 크기가 커서 휴대하기 불편하고 또 구겨지기 쉽다. 몇 곳 샵에서 명함 케이스로 쓸 만한 다른 통이 있을까 찾아봤지만 모두 크거나 작았다. 마침 인조가죽으로 만든 휴대폰 파우치가 디자인도 심플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하지만 이 명함이 기존에 있는 어느 휴대폰 사이즈와 비슷한 지 알 길이 없었다. 급한 대로 종이봉투에 넣어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가죽공예를 하는 병수와 수정 부부가 놀러왔다. 작년 연말 파티에 왔을 때, 이왕 가죽공예를 할 거면 한국에 잠시 가서 배우고 오는 것도 좋겠다는 조언을 했었는데 그 사이 결심을 했고, 한국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명함첩 이야기를 했더니 고맙게도 선물을 해주겠단다. 수정 씨는 크기도 작고 별 것도 없을 것 같은 명함첩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부탁한 사람이 미안할 만큼 많은 고민을 했다. 가죽의 선택에서부터 디자인, 그리고 마감과 실의 선택까지.













그래서 받은 명함첩이다. 명함 15장 정도를 넣을 수 있으면 좋겠고, 구겨지지 않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수정 씨는 이렇게 소화했다. 작은 나무토막을 덧대서 틀을 잡고, 두툼한 가죽으로 마무리했다. 맞춤 옷처럼, 명함에 딱 맞다. 기존에 가지고 다니는 수첩과 휴대폰 케이스와 같이 있으면 한 쌍처럼 어울린다. 텅 빈 면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명함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손때가 타면 글씨는 조금씩 흐려지고 지워지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새 명함이 나왔으니, 명함 잘 돌리고 사진도 더 많이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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