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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목적지로 삼아가는 사람들



춤을 직업으로 삼은 무용가 다섯 명과 이틀을 보냈다. 사는 일의 대부분에서 몸은 수단인 것 같은데, 그런 몸을 온전히 목적지로 삼아가는 사람들의 몸짓은 과연 그럴 만했다. 그 몸은 생존보다 실존에 가까워 보였다.

언어의 문법은 내가 가진 오래 되고 큰 궁금증 중에 하나다. 나는 문자언어의 문법과 다른 사진언어의 문법을 항상 고민하고 그런 문법이 잘 구현된 사진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우리 시대에 지배적인 언어는 디자인인 것 같아서 그 문법을 고민하고, 사진과 다른 영상언어의 문법을 배우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번 기회는 몸을 바탕으로 삼은 무용의 문법을 관찰했다. 대부분의 고급 언어가 그렇듯 그들의 문법을 배운 적 없는 내게 그들의 몸짓은 멀었다. 그들이 몸으로 쓰는 언어는 고급 응용의 수준에 있었는데, 나는 그 언어의 기초 구조 정도를 겨우 짐작하는 수준이니까.

예술의 여러 장르는 각자 그 장르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한다. 사진은 텍스트로 할 수 없는 말을 해야 하고 무용도 마땅히 그럴 것이어서 나는 궁금했다. 의식에서 단어나 이미지의 형태로 떠오른 주제가 몸짓의 문법으로 옮겨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를 물었다.

춤추는 그들의 몸을 본 후, 수첩에 적어둔 내 질문이 참 비루해보였다. 줄글로 겨우 적는 문자의 질문 한참 너머에서 그들은 춤추는 것 같았다. 이미 한참 전에 그들이 벗어버린 문자의 외투를 붙들고 그들의 언어를 눈대중으로 재어보려 덤빈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이번 작업에 나는 영상팀으로 참가했다. 카메라를 들고는 있었지만 사진을 찍지 않고 비디오 모드로 작업했다. 뭘 믿고 내게 영상을 의뢰하나 싶었지만, 영상을 맡은 경험 많은 스탭이 나 말고도 둘이나 더 있고, 사진은 또 다른 실력자가 맡고 있었다. 결과물 걱정 말고 마음대로 작업해 보라는 말에 기대서 수락했다.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으로 뷰파인더에 눈을 고정하고 영상을 찍었다. 이틀동안 빛도 좋았고 공간도, 모델도 빠질 것이 없었다. 핑계 대고 피할 곳이 없어졌다. 못 만들면 모두 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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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Weather

안부를 전하고, 묻는다.

촬영 장비를 꾸렸다. 제주사람 스무 명의 사진을 찍는 이번 프로젝트의 첫 촬영이 내일 아침이다. 스무 명의 사람을 찾아내고 모델 요청을 하고, 한 명씩 시간을 조율해서 이곳으로 불러 컬러체험을 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제 그들이 고른 색깔로 그들의 배경천을 물들였고, 내일 새벽 첫 모델을 시작으로 보름 가까이 제주 섬 곳곳을 옮겨다니며 그들의 포트레이트를 찍는다. 

 

첫 사진이니까, 혹시 부족한 것은 없을까 따져보며 조금 넉넉하게 준비했다. 조명 스탠드도 하나 더, 조명도 하나 더, 렌즈도 혹시 모를 화각까지 하나 더. 지금까지의 과정이 준비였다면 내일부터 내 무대가 시작인 것인데, 지금까지의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내일부터 잘 해낼 수 있을까 미리 걱정할 틈도 없었다. 짐을 몇 개의 덩어리로 꾸려놓고 나니 각오가 새삼스럽다. 잘 찍어야지. 그래야 지난 시간이 아깝지 않을 거니까. 좋은 사진을 위해서 제법 고생스러웠으니까. 엉망인 사진으로 전체 과정의 수고를 헛되게 만들지 말아야지. 잘 될 거야, 혼자 다독인다.

 

모델을 섭외하며, 나는 인간관계가 그다지 넓지 않고,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 노력하는 사람은 아니구나 생각했다. 하루에 몇 통의 섭외를 주고 받고 시간을 조율하는 과정이 촬영보다 더 피곤했다. 아, 지난 번 작업도 비슷했구나 생각이 들며, 기억력이 나쁜 탓에 매번 새로운 작업을 이어나가는 구나 싶다. 

 

사진보다 말이 앞서면 낭패인데, 작업 컨셉을 설명하면 다들 '좋은 작업이다.', '멋있다.' 한다. 여보세요들, 그러니까 그 감탄이 사진을 보고 나와야 되는 건데. 이번 전시도 또 말로 쓰는 사진전 되나.

 

여기는 귤이 제철이다. 섬 사방이 온통 노란 귤을 매달고 있는 귤나무 천지다. 오늘 간 곳은 새 농법 중에 하나인 '타이백 재배'를 하는 곳이다. 건축자재로 쓰는 타이백은 일종의 투습방수포인데, 이걸 귤밭 바닥에 꼼꼼하게 깔아 둔다. 땅속의 습기는 공중으로 배출되지만 빗물은 땅으로 스미지 못 한다. 그러면 귤나무는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열매에 당분을 모은다. 더 당도가 높은 귤이 나온다. 타이백 농법을 설명하던 농부는 인터뷰 말미에 말했다.

"나무한테는 못 할 짓이지요."

나무에 대한 연민은 없다. 다들 비슷하게 산다.

 

초상권 동의서만 얼른 만들어 두고 자야겠다. 새벽 갈 길이 멀다. 안부를 전하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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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Weather

조르바의 마음은 거칠 곳 없다.

조르바의 마음은 거칠 곳 없다. 기쁠 때는 몸을 떨며 춤추고 슬플 때는 마음의 바닥까지 무너진다. 그렇게 모든 감정의 한가운데를 통과하지만 휘둘리지 않는다. 닿기 어려운 경지다. 나는 그러질 못 해서 마음은 여러 사태의 경계선에서 온갖 감정을 기웃거린다. 조금 덜 다치고 가능한 안전하게 위태롭기 위해서 마음이 가도 되는 곳과 가서는 안 되는 곳을 살펴야 한다. 상대의 부족함으로 나를 위로하는 마음은 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 불쑥불쑥 아침잠에서 깰 때 마주치는 무기력도 가서는 안 되는 마음이다. 어제보다 나아진 것 없는 오늘이라는 마음 쪽으로도 안 가는 것이 좋다. 가지 말아야 할 마음은 날마다 늘어나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계속 모호해서 마음은 갈피를 못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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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우리 이럴려고

  장마 중에 모처럼 날이 좋아서 늦은 오후에 의자 세 개와 테이블을 챙겼다. 아내와 마루가 특별히 좋아하는 치킨집에서 순살치킨을 하나 사서 아무 방파제에 앉았다. 닭 한 마리를 다 먹을 때쯤 해도 기울었다. 좋았다. 맞아, 우리 이럴려고 제주에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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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Weather

내가 조금 더 큰 도토리다.

사부작 사부작 다시 몇 줄 적어 놓으려고. 올 하반기는 제법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어떻게든 뭐든 해봐얄 것 같아서. 몇 종류의 SNS와 블로그, 홈페이지, 글을 적으려고 일주일 일정표를 짜놓았다. 월요일에는 어디를 쓰고 화요일은 어디를 쓰고 하는 식으로 일주일을 채워놓았다. 화요일은 여기, 가장 애착이 가지만 구석에 숨겨둔 것 같은 내 홈피. 전에 쓴 글은 1월이네. 그러니까 상반기의 시작에 쓰고 반 년을 지나 다시 쓰는구나. 조금 더 자주 쓰려고 마음은 먹었는데 두고 보아야지. 주제도 없지만, 여기는 적으려고.

 

마루는 자전거 레벨4를 달성했다. 섬의 아이는 항구의 빈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배운다. 워낙 넓고 비어서 제 세상인데, 그래도 한쪽에 바다가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처음에는 주저했다. 네가 아무리 간들 바다까지는 한참이고 아빠가 그걸 그냥 보고 있을 리도 없단다. 몇 번 자전거를 타더니 자기는 몇 레벨이냐고 묻는다. 게임이 심취하신 초등 1학년이니까, 레벨이라는 개념이 재밌나 보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자전거 타기 레벨을 10단계로 정하고, 너는 그 중에 3레벨이라고 했다. 이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는 아이가 1레벨, 보조바퀴가 달린 네발 자전거를 타는 게 2레벨, 보조바퀴를 떼고 더듬더듬 탈 수 있는 게 3레벨이라고 알려주었다. 지금 마루가 타는 자전거는 안장에 앉으면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까치발을 하면 겨우 닿을 듯 말듯. 그래서 균형 잡기가 쉽지 않다. 지난 몇 번의 연습으로 일단 처음에만 조금 잡아주면 제법 페달을 굴리며 잘 타는데, 균형을 잡아야 하는 출발은 아직 쉽지 않다. 그래서 비틀거리지 않고, 한 번에 출발할 수 있으면 레벨4가 된다고 알려주었다. 게임 같았을까? 아이는 갑자기 자전거 연습에 열이 올랐다. 레벨4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연속해서 10번! 넘어지지 않고 출발해야 한다. 웬 걸? 안 될줄 알았는데 아이는 한 번 두 번 하더니 어느새 10번을 채운다. 장하다, 아들. 너는 이제 자전거 레벨4다.

 

함께 자전거 타는 친구 이름을 들먹이며 그 친구는 아직 3이지 않냐고 묻는다. 그래, 하지만 그 친구도 금방 4단계가 될 거라고 알려주었다. 키재는 도토리 같은 것들. 아빠는 레벨8쯤 되는데. 내가 조금 더 큰 도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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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Weather

영정사진

아흔일곱 할머니의 영정사진

 

제주 서북쪽 섬, 비양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할머니는 일흔다섯까지 물질을 하는 해녀로 살았다. 무릎 수술을 한 후 물질도 그만 두고 목발을 짚어야 하지만 아직 정정하다. 젊을 때 이야기를 묻고, 가족 이야기를 물으니까 할머니 눈가가 젖는다.

 

"엄마, 또 우신다."

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슬며시 엄마의 눈물을 닦았다. 아이 여덞을 낳아서 셋은 죽었고, 지금은 다섯이 남았다. 막내가 마흔을 넘겼고, 손주들도 시집 장가를 갔다. 할머니의 소원은 남은 손자 장가가는 걸 보는 일이다.

 

비양도의 세세한 물길을 모두 알고 있는 할머니에게 한 번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물었다.

 

"지금이 제일 좋아. 젊어서는 고생했지. 이제 아이들도 다 크고 말도 잘 듣고 나 잘 살펴주고. 지금이 좋아."

 

"우문에 현답이네요."

따라온 큰며느리가 말했다.

 

비양도 섬집에는 할머니 혼자 사시는데, 방 하나는 비었으니 꼭 비양도에 놀러와서 묵어가라고 하신다.

비양도가 갑자기 훅,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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