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gogh.net

내 누나들

정원 가꾸는 사람을 취재하고 왔다. 내가 직접 꾸리는 인터뷰는 아니고, 한국측에서 취재 질문을 모두 보내주어서 나는 가서 적힌 대로 묻고 말하는 대로 받아 적으면 되는, 답답하기도 하고 맘 편하기도 한 인터뷰다. 삼 십 대 중반이라는 여인은 일본 국적의 중국인이라고 했는데, 시내 중심의 옛 주택에 세들어 살면서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정원은 넓었고, 포근했다. 정원에 대한 인상이 참 좋아서, 잡지가 시키지 않은 질문도 몇 개 섞어서 했다. 그리고 다음에 꼭 놀러가겠다고 예약해 두었다. 한참 공사중인 거실에는 150인치 스크린이 걸리고 홈시어터 시스템이 구축될 것인데, 며칠 뒤에 친구들이 와서 축구를 보기로 했다고 한다. 다음에 갈 때 정원을 닮은, 여백이 넓은 사진을 한 장 선물하고 맘에 드는 화분이나 하나 삥뜯어 와야겠다. 그리고 그녀는 근처 안푸루.에 작은 가게를 열고 있는 친구도 소개시켜 주었는데, 프랑스에서 색채 디자인을 공부했다는 다른 그녀.는 내게 또 유용할 듯했다. 조만간에 호텔 작업 사진들을 몽땅 들고 가서 색에 대한 조언을 좀 구해야겠다.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세상에 대해 묻고 정리해서 쓰고 다른 사람들이 읽게 하는 작업은 매력적이다. 한 때의 열병처럼 또 찾아온 생각의 덩어리들은 사람이 사는 일에 대한 문제들이니까, 아마 그 답도 사람이 사는 이야기 속에 있을 것이다. 비슷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인터뷰 팀을 꾸릴까 보다. 그래서 지구인.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색깔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관계 맺어야겠다.

내일 아침 촬영 가기 전까지 작업해야 할 사진들은 거의 밤샘을 해야 할 분량인데, 최근 10년 사이에 술 마시고 논다고 두어 번 밤 샌 적은 있어도 일하면서는 그래 본 기억이 없어서, 오늘도 안 할 것이다. 아마. 그러니까 수면 시간을 조금 줄이는(많이는 아니고) 수준에서 작업은 눈치 못 챌 만큼, 혹 눈치를 채도 욕하지는 않을 만큼 날림으로 하게 될 것이다. 사는 게 그렇지 뭐.

텃밭 누야에게 메일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밀린 일기처럼 됐다. 누야는 오랜만에 차근차근 적어서 안부를 전해왔는데, 잊었던 풍경이 눈앞에 다시 펼치는 듯했다. 나도 그에 걸맞는 답장을 하려면 우선은 닥친 이 덩어리 일들을 어떻게 좀 안 보이는 곳으로 밀쳐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며칠은 걸려야 되고, 며칠은 더 목에 가시를 걸고 있어야겠다. 도꾸 안부도 물어야 되고, 가죽 놀이는 재밌는지 물어야 되고, 나는 여전하다고 써야 하는데.

영숙 누나는 들어온 소개팅도 못 할만큼 바쁘댄다. 나보다 더 내 밥을 걱정하는 것은 내가 한참 못 먹고 못 살던 하필 그 때에 나를 알아서다. 한국 갈 때마다 불러서 밥먹이는 사람이고, 머리가 아프면 소화제를 먹으라는 진리를 알려준 사람도 누나다. 참, 누나 동생 진숙씨 결혼식이 이 때쯤이었던 듯 한데. 축하한다는 말이라도 전해야 하는데. 연락을 해야겠다.

은경 누나가 중국에 놀러온다고 한 게 아마 이 쯤인데, 그러고 보니 딱 이 쯤인데 바쁘다는 핑계로 소식을 못 물었다.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누나는 영숙 누나랑 마치 바톤 터치하듯 배고프고 서러울 때 나를 불러 먹이셨다. 이번에 못 보고 그냥 보내면 두고 두고 미안하겠다. 어서 어서.

파블로 비욘디의 사계. 오이스트라흐의 베토벤 소나타. 내가 어떤 성향의 음악이 듣고 싶다고 할 때마다 바람소리 누나는 거기에 딱 맞는 연주자와 음악을 알려주고, 많은 경우에 음반까지 찾아서 빌려준다. 파블로 비욘디의 사계.는 당시의 악기로 연주한 원전 연주라고 하는데, 이게 물건이다. 이래서 이름을 사계.라고 붙였구나 싶다. 오이스트라흐와 오보린?의 바이올린 소나타 협주는... 이게... 또 물건이다. 두 명의 대가는 참...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팽팽하기도 하고 배려하기도 하는 듯한데, 아무 것도 모르고 들었을 때 나는 나이 든 연인이 연주하는 줄 알았다. 절대로 앞서지 않기 위해, 절대로 물러서지 않기 위해 그 절묘한 선 위에 있기 위해 둘은 얼마나 공들여서 연주했을까? 그 미묘한 한 점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이제 겨우 입문하는 입장에서 곡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래도 한 곡씩 한 곡씩 좋아하는 곡들이 생기고, 그 곡들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언제쯤 나는 또 쓸 것이다. 나는 누나에게 오디오 장비를 뽐뿌했는데, 누나는 내게 좋은 음악을 돌려주니까 어째 균형이 안 맞는다. 고마운 음악 길잡이다. 그러 누나에게 나는 카메라, 오디오, 자전거를 차례 차례 뽐뿌하고 있다.

"누나, 나 완전 아줌마 파마 하면 완전 이상할까? 머리가 너무 길었어" 낮에 문자 보냈더니 아직도 답이 없다. 내가 아무 이름도 안 붙이고 부르는 내 누나. 굶을 때는 카드를 하사하시어 나를 살리시고 기 죽을 때는 그래도 믿는다고 매형과 함께 더블로 응원하고 스타일이라고는 개뿔도 없었던 동생을 직접 고른 옷들로 덮었다. 같이 손 잡고 마트 가면 어찌나 마음 편하게 아무 물건이나 막 집게 되는지 원.  가족이 무엇인지, 나는 오래 걸려 알았다. 근데 누나, 이번에 준 카드는 잘 안 되더라?

나는 참 여러 누나들에게 빚지고 산다. 그러니까 내가 얼른 얼른 잘 자라서 내가 받은 만큼, 거기에 조금 보태서 세상에 돌려주어야 한다.


아, 정원이 어땠냐면...


Categories

전체글 (346)

Trackbacks

Favorite Tags

믹시

Photographer Mark Ban Blog Ver.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