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블로그 글

2006년 짧은 글 모음

2006.12.26 08:15


  반짝.


  작정하는 글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2006.12.19 17:20

연말인사








  제법 하루 종일 걸려 연말인사를 발송했다. 주로 쓰는 G mail로 발송하려고 했지만 html기능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어쩔 수 없이 다음.메일을 이용해서 단체메일로 보냈다.


  연말인사 보내며, 일 년만에 메일주소록을 열어보며 그 사이 내가 제법 움직여 왔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더디고 더뎌서 무엇도 나아진 것을 몰랐다. 한 해 사이에, 나는 내 이름으로 된 작업실을 가졌고 부족한 몇 장의 포트폴리오도 가졌다. 대충 사는 하루들에게 참 부끄러웠는데, 멈추어 있지는 않았구나. 대견하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보고 메일주소를 옮겨쓰면 사람들 얼굴이 하나 하나 떠오르고 하나 하나 얼굴에게 전해야 할 안부와 묻고 싶은 이야기들이 또 하나 하나 짝을 맞추어 떠오른다. 쉽게 단체메일 턱.하니 보내는 것이 끝끝내 미안한 것도 같은 이유다.


  올해도 스무 명 넘는 인연들이 메일을 돌려보냈다. 어떤 사람은 메일 주소가 없어졌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편지함 용량이 꽉 찼다고 한다. 비슷한 것이다. 다른 주소를 쓰니 관리를 안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넘치는 거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연락처를 잃어간다. 몇 명의 인연이 새로 생겨나는 것과 전혀 별개의 문제로, 잊혀지고 묻게 되는 인연들이 많이 아쉽다.


  인연들이, 부디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나도 돕겠다.








2006.12.14 18:20


  버스 내려 길 걸으며 내가 가진 것들을 생각했다. 정확하게 말해서, 나는 내가 가진 것의 얼마를 쓰며 사는가? 생각했다. 대충만 따져보아도 20% 남짓, 잘 쳐준다 해도 25%를 넘지 못 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가진(자각하는) 에너지의 20%를 쓰며 살고 있다. 고작 그 정도로 애쓰며 힘들다고 나 아닌 것을 탓한다.

  내가 느끼는 불안함과 불만족 따위의 감정이란 것들은 결국 완전히 연소시키지 못한, 어쩌면 불붙어보지도 못한 에너지의 불쾌한 찌꺼기. 그 냄새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다음 내 목표는 어떻게 좀 더 많은 에너지를 쓰며 사는 시스템을 내 안에 구축할 것인가? 로 결론 지을 수 있다.


  사이트의 메뉴구성을 약간 바꾸고 지난 한 해 동안 잡지에 썼던 글과 사진들을 모아 올렸다. 차곡차곡 쌓아두고 보니 겨울 맞은 농부의 심정을 알겠다.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몰랐는데 돌아보니 제법 쌓이고 있었던 것을 알겠다. 사이트 개편은 내 포트폴리오로서 이후 작업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도록 만들었다.


  연말인사를 다 썼다. 드디어. 문장이 겉도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당장 발송하지 않고 하루이틀 두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조금 자난 다음, 여전히 아쉬운 문장을 시간에 떠밀려 인연들에게 보내야겠다. 인연들아, 어느새 또 한 해가 지났다.







2006.12.09 08:33


  어떤 비는 내린 후 추워졌고 어떤 비는 내린 후 따뜻해졌다. 어제는 종일 내리는듯 마는듯 비가 왔는데 오늘 아침 나오는 길에 바람이 부쩍 각을 세워 찌른다. 그래서,


바야흐로 


겨울.



  한 달 가까이 끌어오던 일이 어제 파티촬영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시안작업부터 본촬영, 추가 작업까지 하나의 리듬을 가지고 이어져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욕심을 많이 내는, 그만큼의 욕심에 어울리는 준비를 보여준 de all 식구들 덕분에 즐겁게 작업했다. 지금 한참 카피중인 사진들을 확인하고 작업하고 프린트해서 넘겨주면 일이 끝난다.


  예진이와 이야기하던 중에, 나는 사람마다 색의 절정.을 맞는 시기는 다를 것 같다고 말했다. 가능성.을 본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지금 내 앞에서 인연들이 절정.의 색을 뿜어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예진이는 한 걸음 나아가, 색깔이 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여전히 선형적인 시간 위에서 색의 옅음과 짙음 사이를 오가고 있는 내가 멍.해졌다. 맞다, 색깔이 변할 수도 있는 거구나. 새삼스러웠다. 색깔에는 우열이 없다.


  이제, 연말인사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2006.12.02 18:56

고양이가 되는 꿈


  한 마리 고양이로 살아도 좋을 것이다. 하나의 공간에 있고 하나의 동작 속에 동참할 때조차 고양이는 온전히 소속되지 않는다. 설사 살 부비고 있더라도 고양이는 온전한 자신만의 공간을 온전히 남겨두고 있다. 밥을 얻어먹고 물을 얻어마시고 잠자리를 제공받아도 고양이는 고양이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일 것까지 있겠는가 어디. 하이에나가 아니면 어떨까 또. 생명이라면, 이렇게 완벽하고 온전하게 분리된 자기만의 공간을 가져야 한다. 적어도 자존심 있는 생명이라면 그래야 한다. 뭐 무생물이라고 갖지 말란 법 있겠나 어디. 다 떨어진 소파 위에 앉아 눈을 감았다 뜨는 가필이처럼, 완전히 어두워진 작업실에서 노란색 조명을 켜고 비율 안 맞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큰 음악을 듣는 나도 그랬으면 싶다.  


  매 월 잡지가 올 때마다 나는 내가 쓴 문장을 보며 부끄럽다. 어떡하나. 글 써야 하는데 이렇게 문장 앞에 겁만 늘어나니 이 일을 어떡하면 좋으나. 허영으로 가득 채운 문장은 아니다. 제법 몇 년 애썼으니 내 문장에 허영은 빠졌다. 적어도 아주 조금은 빠졌다. 소금에 쓴맛 빠지듯 빠졌다. 그래도 시간에 쫓겨 대충 갈겨내는 문장은 얕고 거추장스럽다. 시간에 쫓겨 쓴다는 사실이 내 문장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고, 나도 거기에 기댈 생각 없다. 내 문장이 아직 얕다. 깊숙하게 찔러 들어가지 못 하고, 진득하게 스며들지도 못 하고 겉에서 모양만 내며 읽어달라고, 어서 읽으라고 재촉한다. 아, 어쩌나. 나는 문장을 써야 하는데.


  안재흥 선생님은, 자신은 포스트 모던을 좋아하지만 명백한 모더니스트.라고 하셨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이 삶의 명제가 된 사람들. 나아가지 못 할 때, 참치를 생각한다. 헤엄을 멈추면 참치는 숨을 쉴 수 없고 그러면 참치는 죽는다. 나아가지 못 하면 죽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 때나 나아가기를 멈추어도 생활은 그대로인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나아가고 나아가다가 결국 그 나아감.이 삶 자체가 되어서 나아감.을 빼면 삶에 아무 것도 남는 게 없고 그래서 결국 삶이 없어져 버리는, 그래서 죽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아감.이 없는 삶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죽음보다 더 비참한 현실이 된다.  그 때쯤 되면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 나아감.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는 순간, 세상이 통째 허물어져 내린다. 부단한 의지로 나아가는 게 아니다. 그것 밖에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존재를 알기 때문에 멈출 수 없다. 


  뚜껑 열고 한 달이 넘은 와인은 참 맛이 묘.하다. 어쩌나, 이 것 밖에 남은 게 없다.


  가진 것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다. 내 부모님이 그러셨듯이 나 또한 개쳑하고 개척하며 살아야 한다. 연말 인사 준비하며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고양이같은 그대들이, 오늘 참 많이 보고싶다. 부른 자의 투정이다. 해 떨어진 작업실은 춥고 난로는 따뜻하구나.


  가필이 몸에는 벼룩이 산다. 벼룩은 길이 2~4mm 정도인데 양옆으로 납작하게 생겼다. 그러니까 멀쩡한 벼룩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참 얇게 생겼다. 사진 찍기가 힘들어서 결국 죽여 눕힌 다음에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이 벼룩은 피부에 이빨을 박고 피를 뽑아먹으며 산다. 예전에 곤충소년.이라는 만화가 있었는데 그 만화에서 벼룩은 제 몸 높이의 60배를 뛴다고 나와 있다. 과연 벼룩을 잡아 책상 위에 두면 녀석은 곧 다시 뛰어 가필이 몸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한 번 잡은 벼룩은 딱. 소리가 날 때까지 꼭 눌러 죽여야 한다. 거 참, 벼룩이 피를 먹어 보아야 얼마를 먹겠나? 그래도 가필이가 자꾸 제 등을 핧고, 벡과사전에는 벼룩의 크기 외에도 벼룩의 위해성.에 대해 잔뜩 써 놓았으니 잡으면 죽인다. 사실, 가필이 털 속을 뒤져보면 벼룩이 꽤 많다. 얼른 목욕을 시켜야 할 텐데. 그래도 무릎에 올라오는 가필이를 내칠 수 없다. 벼룩이 내게 옮겨와 보아야 얼마나 오겠나. 매일 비누에 샴푸로 화학코팅을 하는 내게서, 온갖 화학섬유로 만든 옷 속에서 순수자연인 녀석들은 또 얼마나 버텨낼 수 있겠나. 


  인연들아, 부디 쓰러지지 마라. 그대가 쓰러지면 나는 안쓰러움 이전에 화를 내야 할 것 같다. 가진 것들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 대충 살라고 우주가 그대에게 그런 능력을 주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니, 부디 열심히 살아라. 가끔 대충 사는 하루를 만나는 날이면 쓰라린 주정도 해 가면서, 부디 쓰러지지 말자. 그대가 가진 능력만큼, 세상은 아름다워질 권리가 있다. 그리고 능력을 가진 그대는 그만큼 세상을 아름답게 가꿀 의무가 있다. 그러니까 대충 살면 명백한 직무유기.밖에 안 된다. 가끔 의심하겠지만(내가 정말 능력 있을까?), 가끔 회의도 들겠지만(그냥 남들처럼 살면 안 될까?), 그래도 인연아, 쓰러지지 말자. 그대들이 쓰러지면, 세상은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할까? 나는 또 어디에 기대어 우나? 가끔 스스로가 한심해도 부디. 쓰러지지 말자 인연아. (발음이 우습다. 인연.이 이 년.이랑도 비슷하구나.)


  나는, 제대로 가고 있나? 언제나 가장 간절하게 답을 구하고 싶은 문제는 사실 이런 거다. 느리게 가고 빠르게 가는 것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제대로만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언젠가는 닿을 수 있지 않겠나? 밤 같은 새벽 산길을 걸을 때 제일 반가운 것은 이정표였다. 얼마가 남았다는 걸 알 수 있어서 반가운 게 아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길을 걸어왔는데, 내가 가는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는 이정표를 만났을 때 느끼는 안도감과 희열을, 상상할 수 있겠나? 이 길 위에서, 나는 언제쯤 그럴듯한 이정표를 만날 수 있나? 사방이 맹수들로 가득찬 정글을 걷는 느낌인데. 더구나 내가 가려는 목적지도 아련한데.


아, 12월의 주정.


술이 아직 남았는데.









2006.12.02 09:00


아,




12월.







2006.11.27 12:19


  다리 저린다. 날씨가 추워져서 내가 작업실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가필이는 내 무릎에 올라와서 엎드려 잔다. 오늘 아침에는 작업복이 발톱에 걸려 조금 상했다. 안 쓰는 커튼을 크고 두껍게 접어 무릎 위에 올려두니 그 위에서 잔다. 저도 나도 따뜻해서 좋기는 한데 고양이와 살쾡이 중간 정도의 덩치를 가지고 하는 짓은 개를 닮은 이 녀석은 꽤나 무릎을 저리게 한다. 곤히 자고 있는 녀석을 그렇다고 쫓아낼 수는 없지 않나.


  오전 내내 부글거리며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했던 속이 이제 좀 잔다. 어제 승희형, 먼지, 혜정이와 함께 먹은 양꼬치가 문제였다. 맛있디고 평소에 잘 먹지 않던 매운 음식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었다. 오후 촬영까지는 몸이 컨디션을 회복해주어야 한다.


  몇 년만에 내 돈 주고 옷을 샀다. 두툼한 담요같이 생겨서 입으면 이불 속에 들어가 걷는 느낌이 든다. 새옷 냄새. 나쁘지 않다. 새삼 내 모든 옷 구입을 알아서 해주는 누나에게 고맙다. 


  내년에 쓰려는 책의 얼개가 대충은 잡히고 있다. 상하이를 찾는 사람들이 한 권쯤 갖고 오고 싶은, 그런 책을 쓰겠다. 상하이와 예술을 한 데 어우르는 책이 될 거다. 우선 타겟을 확실히 정하고, 너무 욕심 부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글의 내용을 정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문장의 틀.을 정하려고 한다. 책에 관한 부분은 예진이에게 많은 도움을 받기로 했다. 관련된 좋은 책들을 권해 주어서 잘 읽었다.


  꼬박 열흘도 더 비 내린다. 끊길듯 끊길듯 끊기지 않고 내려서 사람을 참 지치게 만든다. 빛 못 보고 덕분에 물도 못 얻어먹는 작업실 잔디들도 기운이 없다. 


  방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이불을 새로 사고 옷장도 옮길까 한다. 청소도 조금 해야겠다. 어차피 잠만 자는 공간이니 무엇도 더 들이거나 꾸미지 않을 작정이었다. 정착할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떠날 곳이라는 생각이 그런 다짐을 만들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 방인데, 포근한 느낌은 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한 소리 들었다. 작업실에 쓰는 돈 귀퉁이를 아주 조금만 떼어서 방에 쓰기로 했다. 이번 한 번만.


  연말인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마음에 틈이 없다. 오늘 촬영과 내일 수금, 사진 전달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일주일 정도는 크게 바쁘지 않으니 조금 몰아쳐서 작업실 청소도 하고 연말인사도 만들어야겠다. 해마다 조금씩 늘어나는 인연들은 연말인사 보낼 때쯤이면 나를 참 즐겁게 만든다. 올해는 어떤 사진을 쓰나? 올해는 어떤 말을 하고 또 어떤 다짐을 쓰나? 올해, 아름다운 인연들은 어떻게 살아내 주었나?


  소소한 자투리같은 사건들이 참 귀하고 곱다.









2006.11.24 10:17


  전과책 보던 무렵 이야기다. 동아전과 아니면 표준전과. 동아전과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유럽식 건축물의 느낌이었고, 표준전과는 모던하게 각을 세운 현대건축물 같았다. 초등학생이 볼 수 있는 가장 두꺼운 책 중에 한 권이었을 전과 안에는 교과과정 내용 외에도 토막토막 작은 읽을거리들을 두어 지루함을 덜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솥을 일곱 번 건 손병희' 아마 비슷한 제목이었다. 어쩌면 손병희. 대신에 최시형.이었을 수도 있다. 최시형은 동학의 2대 교주고 손병희는 3대 교주다. 만약 제목이 손병희.였다면, 어느날 최시형이 손병희를 부엌으로 불렀다. (제목이 최시형.이었다면 부엌으로 부른 사람은 최제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가마솥을 걸라고 말했다. 손병희는 진흙을 쌓아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솥을 걸었다. 최시형은 솥의 수평이 맞지 않는다고 다시 걸 것을 명령했다. 손병희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솥을 들어내고 아궁이를 허문 다음 처음부터 진흙을 쌓고 다시 솥을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구멍이 아쉽다는 이유로 다시 솥을 들어내야 했고 이렇게 최시형은 일곱 번 솥을 다시 걸게 했고 그 때마다 손병희는 아무 말 없이 아궁이를 허물었다. 일곱 번 솥을 건 다음에야 최시형은 손병희의 사람됨을 마침내 인정하고 동학의 교주가 되도록 했다고, 이야기는 쓰고 있었다.


  이야기는 오래도록 남아서, 어떤 일을 할 때 지칠만큼 반복되는 순간이 오면 꼭 다시 기억났다. 그러면 나는 세상의 시험을 받는 심정으로 몇 번이고 비슷한 과정을 반복했고 그 끝에서 실체도 없는 무엇에게 이겼다는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일곱 번의 숫자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몇 번이고 다시 나를 몰아갈 수 있을까의 문제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습관적인 몸짓에 머물지 않고 매번 새로운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음식 다섯 컷을 찍기로 했던 촬영은 아침 열 시에 시작해서 밤 열 시를 넘겨 겨우 끝났다. 사진을 리뷰하던 텔레비젼은 중간에 고장나고, 낡은 조명은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했다. 보이는 상황들 앞에서 물러서기 싫었다. 클라이언트의 ok 사인이 떨어지고도 내가 먼저 한 컷 더 찍겠다고 덤볐던 것은, 아궁이를 허물고 다시 흙을 쌓는 손병희의 모습이 내 등뒤에서 지켜보고 있어서였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나 혼자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까다롭게 소품을 챙기고 좋은 안목으로 사진을 살펴준 사장님 덕분에, 그리고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작업해준 정 디자이너님 덕분에 나는 좋은 사진 몇 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2006.11.05 19:44


  쓰던 수첩이 몇 장 남지 않았다. 첫 장에는 

  “삼성동 공항버스터미널 2층” 이라고 적었다. 아마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에는 지난 봄 교통대 정원에서 끄적인 메모가 있다.

  “교통대 다녀왔다. 꼭 2년 전 이 맘 때다. 상하이 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것이. 같은 계절 같은 공간에 있어보면 참 여러 가지가 생각난다. 막막함으로 첫 걸음 디디던 그 때부터 한 명의 사진가로 이름을 내어 거는 지금까지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고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여전히 잔디는 푸르고 여전히 학생들은 오가는데 그 때의 학생들은 아닐 것이다.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선가 나름의 걸음을 걷고 있을 테다. 그 때의 내가 아닌 내가 부지런히 걸음 걸어 지금에 닿아 있듯이.” 라고 쓰고 있다.


  다 쓴 수첩을 버리지 않는다. 따로 한 곳에 모아두지 않지만 버리지 않으니 책장 어디쯤이나 선반 어디쯤에 하나씩 있을 것이다. 약속 장소 메모, 클라이언트 전화번호, 최종 수정할 사진들의 번호, 포트폴리오를 보낼 잡지사 명단, 갑자기 연락 받은 오랜 친구의 소식 따위들. 수첩 쓸 동안의 소소한 기록들은 자연스런 일기 같아서 버릴 수 없다. 전화번호 하나, 약속 메모 하나 볼 때마다 상대방의 목소리와 그 때 작업실에서 듣던 음악까지 떠오른다. 하루 세 끼를 식빵으로 연명하던 힘든 시기의 메모는 그 크기가 더욱 크다. 다듬고 걸러낸 문장으로 채워놓은 홈페이지가 정돈된 생각의 일기라면 소소한 기록들로 채운 수첩은 조금 다른 일기다. 시인은, “인생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제법 비싸게 주고 새 수첩을 샀다. 오래도록 쓸 생각이다. 가죽으로 점잖게 겉장을 만들고 단단하고 거친 속지를 끼워놓은 수첩이다. 다 쓴 속지는 통째 바꿔 넣을 수 있는데, 아무 장식 없는 것으로 세 권을 추가 주문하고 왔다. 옆에 작은 수첩도 보였는데, 휴대성과 공간 활용도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큰 것으로 골랐다. 어제 아는 동생이 사주겠다는 것을 됐다며 그냥 지나쳤는데 오늘 버스 타고 지나는 길에 마음이 서서 다시 가 샀다. 작은 수첩은 들고 다니기 편해서 필드작업하며 쓰기에 편하지만 조금 쓰면 다음 장으로 넘겨야 해서 생각의 맥을 끊기 쉽다. 휴대성을 조금 손해보기로 하고 대신 생각을 크고 자유롭게 펼쳐낼 수 있는 녀석으로 골랐다. 명색 글 쓰겠다는 녀석이니까. 다만 펜을 끼울 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며칠 책 읽을 욕심에 두세 권씩 한꺼번에 가지고 다닌다. 읽다가 중간에 내려놓고 다른 책을 읽기도 하고 쉽게 읽히는 책은 하루 낮동안에 훌쩍 읽어내기도 한다. 이번에 새로 온 책들이다. 작가의 방.이라는 책은 잘 된 인터뷰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석제의 이름은 몇 번 들었는데, 이번에 단편 소설집을 읽어 보니 이야기꾼.이라는 평가가 제대로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 속에서 이문열은 하루 열 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원고를 쓰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지영은 젊음은 하나의 형벌 같다고 말한다. 너른 작업실을 꾸리며 내 젊음은 너무 나태하지 않은가? 반성한다.


  요즘 문장을 쓸 때 가장 주의하는 부분은 쓸 데 없는 힘을 빼는 일이다. 그러나 쓸 데 있는 힘과 그렇지 않은 힘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참 위태로운 작업이고 자칫하면 문장 자체가 허물어질 수 있어서 어렵다.







2006.11.01 07:49


  두 분 오셔서 일주일 머물다 돌아가셨다.


  따져보니 얼추 10년이 넘었다. 집 나와 사는 것이. 10년의 간격을 생각하지 못 하고 살았는데, 이번 두 분과 함께 있는 동안 그 무게를 알았다.


  많은 것을 생각한다.


  새로 주문한 책이 스무 권 가량


  한국에서 책 선물이 왔다. 영미 누나는 직접 쓴 책을 주었고, 함께 왔던 성지희양은 성석제의 새소설을 보내주었다. 참 고맙고 고맙다.


  곧, 여행을 떠날 것이다. 챙겨야 할 것들도 많고, 매듭을 짓고 디딘 땅을 다져야할 일도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삽한 가지 몇 개를 쳐야 한다.


  집 열쇠를 두고 나와 오랜만에 작업실에서 잤다. 고양이는 여전히 밤새 놀았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가슴 한 가운데가 뜨끔거렸지만 감기 안 걸렸다.


  작업실에서 처음 돈 벌어 저녁 먹으러 갔던 그 일식집에 어제 디렉터와 다시 갔다. 그 때를 이야기하며 1년 뒤에 우리는 이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물었다. 조금은 더 풍성한 마음으로 즐겁게 지금을 돌아볼 거다.


  새 책이 많이 생겨서, 참 좋다.





2006.10.01 17:00


  품 안에서 새끼 고양이가 잠들었다. 한참을 세차게 뛰어놀다가 내 팔 안에 와서는 그르릉거리며 잔다. 깨울 수가 없어 움직일 수 없었다. 몸도 생각도 움직일 수 없었다. 생각이 크게 널뛰면 호흡이 따라 뛰고 고양이가 깨어날 것이다. 내 품 안에서 잠든 녀석의 꿈이 편안하고 아름답도록,  꼭 지켜내고 싶었다.


  물론, 다 자고 일어난 고양이는 또 나를 할퀴며 놀았다.


  사는 동안에 어떤 형태로든 위기는 온다. 개인의 삶 속에도 오고 관계 속에도 온다. 하지만 말이다. 시간이 예비하는 것이 위기만은 아니지 않겠나. 위태로운 시간을 지혜롭게 이겨낼 수 있는 현명함과 배려, 그리고 용기와 확신 같은 것들. 시간 안에서는 그것들도 함께 온단다. 미리부터 겁먹지 말자.


  하늘은 높아서 닿을 수 없다. 그러나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이 걷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은 아니다. 


  산이 해마다 한 번씩 크게 몸을 떨어 계절을 갈아입듯이, 바다도 큰 바람이 부는 때에 맞춰 몸을 턴다. 그 때 얕은 바다는 몸을 통째 뒤집어 색깔을 바꾼다. 호흡이 가빠진 생선이며 조개는 물 위로 뜨거나 얕은 곳으로 나온다. 내 사진을 한 번 털어야 할까? 지난 밤에 생각했다.






2006.09.25 07:36


  "나는 세상 전부가 너무 고마워요."

  "그런데 어쩌죠. 전 바느질도 잘 못 해요. 가정부를 찾았던 거군요."


  세상은 참 많은 우주를 품고 있어서, 나 하나의 생각으로 잴 수 없다.


  특별하지 않은 남자와 특별하지 않은 여자

  둘이 되어 보면 세상은 어느 한 구석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쩌나,

  나는 이런 수수께끼같은 낙서를 좋아하지 않는데.





2006.09.22 13:55


  오후 무렵에 골목길은 빛이 좋았다. 탁한 색을 펼치는 담벼락을 겨누고 있는데 앵글 구석이 소리지른다. 그제야 화면 오른쪽 아래에 호떡 파는 부부가 들어와 있는 것을 알았다. 노발대발. 찍지 말랜다. 한참 떨어진 그들에게 걸어가는 동안에도 화는 그칠 줄 몰랐다.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당신들을 찍은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 보았지만 이제 주변 사람들까지 불러가며 야단이다. 더 있을 수 없어서, 더 통하지 않아서 걸어 나왔다. 내 뒷통수가 보이지 않을 곳까지 그들의 목소리는 닿았다. 그들은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마음의 풍요와 몸의 풍요가 닿아 있을 수도 있을 텐데.


  나는 내 아이가 풍요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몸이 풍요로울 때 마음의 풍요를 얻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겠지만, 마음의 풍요로움 또한 좀 더 수월하게 몸의 풍요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는 사실을 삶 속에 익혔으면 좋겠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어려운 젊은 시절을 사셨다. 기억하는 두분의 젊음은 참 부지런했다. 그리고, 참 열심이었다. 감사하다. 그렇게 나를 만들어 주셨다.


  두 분이 다녀가시겠다는 소식. 아침 버스에서 들었다. 멍. 갑자기 어쩐 일로. 명절도 없이 바다 건너에서 고생(?)하는 큰아들이 보시기 안스러우셨던 모양. 그나저나, 이발을 해야 하나? 수염을 깎아야 하나? 이 모습 보면 걱정하실 텐데, 어떻게 단기간에 얼굴이라도 좀 불려 놓지? 두 분께 어떤 사진을 찍어드릴까? 청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오시라고 해야 할까? 앨범을 만들어 드릴까? 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나중에 나중에 생겨날 내 가장 큰 손님, 내 아이에 대해 상상해 보는 날들이 있다.









2006.09.18 08:20


  은경 누나네 집에서 내 방까지 오는데는 느릿하게 걸어서 한 시간이 걸렸다. 새벽에 사람들은 움직이는 점.점. 같았고 빛은 사선으로 들어와 점.점.을 깎았다. 봄 같은 꽃향기도 났는데 이름을 모르는 꽃이었다. 갑자기 생각난 내 속물스러움.이 돌아오는 내내 머리 속에서 머물렀는데, 입안 가득 쓴맛이 돌았다. 나는 그것이 속물스러움.의 맛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연달아 비내리고 난 후 가슴 사무치는 바람이 분다. 사방의 아름다움도 사무친다. 이제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창고 아주머니는 말씀하셨다. 아주머니, 무엇인들 다시 와 줄까요?


  4층 옥상 난간에 호박덩굴이 자란다. 초록 덩굴로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이 호박꽃 한 송이 피워내며 존재를 알려왔다. 반가워서, 그 앞에 한참동안 서서 속물스러움.을 생각하며 사무치는 바람을 맞았다.


  새 작업을 어서 시작하고 싶다.





2006.09.15 09:46


  김훈 선생님의 집이었다. 거실에는 낮고 너른 테이블이 있는데 그 위에 두꺼운 잡지가 놓여있다. 표지를 보지는 못 했지만 꼭 월간 조선만큼이나 두꺼웠다. 마침 책 안에는 김훈 선생에 대한 인터뷰가 실려있었는데, 사진가의 가방.같은 코너에 김훈 선생의 소지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등산과 관련된, 자전거와 관련된 소지품들이 많았다. 인상적인 것은 주머니칼이었는데, 주머니칼보다는 과일 깎는 칼같았다. 칼의 상표는 '횟집칼'이다. 잡지는 자전거 관련 내용이 유독 많았는데, 자전거 뒤에 부착하는 꼬리등의 이름은 생소했다. 몇 번 들어본 것 같은, 그러나 처음 듣는 단어였다. 나갈 시간이 되어서 선생과 함께 문을 나서는데, 아파트였다. 아, 일행도 두어 명 있었다.



  과음한 후에 꾸는 꿈 치고는, 제법 그럴듯 하지 않은가?

  




2006.09.10 18:15


  일요일 늦은 오후 작업실


  어둡다. 맑은 하늘에 크고 무거운 구름들이 바람따라 몰려가고 몰려오는 하루였다. 하늘은 서늘한 바람색이다. 


  손톱이 부러졌다. 좀처럼 없는 일이다. 많이 마셨던 모양이다. 주정처럼 명함 건넸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들은 새벽까지 함께 마시고 이미 밝은 와이탄에서 사진 찍었다. 오전을 잠으로 보내고 일어나도 머리가 말끔하지 않았다.


  내 사진이 참 외롭다고 들었다. 내 사진은, 외로웠을까? 사진에서 외로움을 읽어낸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다. 나는 내 사진에 어떤 단어도 넣어두지 않았다. 


  외롭지 않은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는 그 경계.로 인해 모조리 외롭다. 동전 뒷면처럼. 작은 화분에 자라는 잔디가 느끼는 외로움도 작거나 하찮은 것이 아니다.


  아쿠아리움.에 이어 새롭게 시도할 작업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 카메라는 당분간, 지난 몇 년 잊었던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 보다. 해 보자. 사진이 내가 가진 힘의 부분이라면 애써 접어두지 않겠다.


  상하이 비엔날레를 통해 만난 당대예술의 모습은 우선 세계 예술 속에서 중국적인 것.의 자리찾기에 골몰하는 단면이었다. 또한 개인성을 소멸 또는 무시 또는 단절시키고 전체 속에 매몰된 개별의 현대성을 재현하고 있었다. 나는 그 반대의 입장에 서서 작업해 들어갈 것인데, 모든 조건들을 모조리 배제한 채 오로지 개인성.만을 갖는 모습들을 모아서 당대.를 보여줄 것이다. 개인성은 소멸했거나 그 의미가 축소된 것이 아니라 오롯이 살아 있다는 점을 사진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작업의 결과물은 역설적으로 보일 것이다. 중국 당대사진에서 보여지는 어줍잖고 표피적인 사진을 반박할 것이다. 당장에 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변명하기보다 할 수 있는 일들을 먼저 하겠다.


  개뿔. 사진이나 열심히 찍어라.







2006.09.07 09:34


  지난 밤 작업실이 추웠다. 새벽 공기가 이제는 덥지 않다. 가을 오는 것이 뚜렷해서 위태롭다. 더운 땅에서 여름이 물러가는 때는 하나의 세상이 끝나는 때다. 시작부터 끝까지 더위 속에서 온전하게 만들어지던 하루의 어느 구석이 조금씩 깨어지며 하나의 세상이 끝난다. 세상의 무너짐을 지각한다. 다음에 오는 세상 앞에서 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섭다.


  몇 달만에 작업복을 벗고 구두를 신는 하루다.





2006.09.04 09:16


  비가 참 세차게 온다. 빗방울이 땅 두드리는 소리가 4층 작업실 창문을 뚫는다. 방울끼리 부딪치며 내는 소리도 있다. 좋은 포도주 따르고 좋은 음악 틀어서 하루 종일 취해 있어도 좋을 비다.


  사진잡지에서 기자생활하며 사진강의도 하는 중국인 친구와 만나 이야기했다. 막 인터뷰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담는 프랑스 작가에 대해 들려주었다. 나는 요즘 읽고 있는 '날이미지의 시'와 연관지어 현대사진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부족한 중국어로 답답하기만 했다. 낯설게 찍는 사진은 낯선 소재를 찍거나 낯선 방식으로 찍거나 또는 낯선 시선으로 찍는다.


  작업실에 일찍 나온다. 여섯 시나 일곱 시쯤 깨면 전자렌지에 고구마 두 개 씻어서 넣어두고 나도 씻는다. 고구마가 익는 데는 12분이 걸리는데 내가 빠를 때도 있고 고구마가 빠를 때도 있다. 비닐팩에 고구마 두 개를 담고 집 앞 마트에서 우유 하나를 사서 온다. 작업실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10분이 채 안 걸린다. 일찍 오면 계단은 아직 닫혀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금 늦게 오면 계단으로 온다. 들어오면 컴퓨터 켜고 엠프 켜고 에어컨 켠다. 구멍 뚫어 둔 빈병에 물을 채워 열 개 잔디 화분에 물 주면 아침 일이 끝난다. 고구마 먹으면서 인터넷 뒤적거리면 어느새 아침 시간이 훌쩍 간다. 음악 듣고 뉴스 보며 고구마 먹는 빈둥거림이 참 좋다.


  다음주에 예정대로 돈을 받으면 우선 밀린 임대료를 내고, 그 다음주에 또 예정대로 돈을 받으면 포도주를 한 병쯤 사야겠다. 창고 사람들 모두 돌아가고 텅 빈 밤에 음악 크게 틀고 취해 있어야겠다.


  비가 참 세차다.







2006.09.02 08:04


  바람이 분다. 가을이 오려는 모양이다. 창문 열어 바람을 들이는 것이 한참만이다. 특별한 장식이나 아이템으로 시선을 끌지 말고, 전체적으로 단순하면서 고급스러워야 한다. 표정이나 자세는 크지 않되 가슴과 허리 라인을 드러내야 한다. 조명은 단순하며 부드러워야 한다. 놀이하는 심정으로.


  붉은 색 피는 본능을 긴장시킨다. 상처에서 베어나온 핏조각을 핧아 기운을 차리고 안광을 갈아내는 작고 여린 짐승. 언덕에 앉아 바람 맞는다. 바람이 불어오는 저 먼 바다에는 헤엄을 멈추면 숨 쉴 수 없다는 참치라는 녀석이 산다.




2006.08.27 19:32


삶이, 너무 소란하다.





2006.08.16 07:17


  나를 고민하게 하는 것들.


  열 개 잔디 화분은 날마다 쑥쑥 자란다. 물만 겨우 주는데 하루가 다르게 높이가 변한다. 열 개 중에 두 개 화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싹이 돋았다. 콩나물처럼 빨리 자란다. 나는 잔디 화분을 샀는데, 내 작업실에 열 개 잔디 화분을 두고 싶었는데 별난 녀석 둘은 잔디를 순식간에 배경으로 만들며 주인공처럼 자란다. '뽑아야 하나, 두어야 하나.' 한참만에, 그냥 두기로 한다. 미안해서. 화분 위로 10센티미터 공간을 두고 유리를 올릴 생각인데, 녀석들은 아마 유리를 뚫고 자라지 못하는 한 더 자라지 못 할 것이다. 오고 가는 것이 편안하고 큰 흐름 속에서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산삼이라도 자라날 지.


  마땅히 나아가야 할, 그러나 지지부진 멈추어 있는 일들이 주변에 많이 생겼다. 조금 더 힘을 몰아 걸어야 한다.








2006.08.06 23:04


윈난


   "떠날 거야. 바닥에 닿지 않는 물풀처럼 부유할 거야. 다시는 그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않을래. 땅들은 모두들 상처를 앞세워 왔어. 뿌리내리고 싶거든 먼저 상처부터 껴안으라고 들이밀었어. 채 아물지도 않은 내게. 이제 어디도 멈추어있지 않을래."

  "잘 가. 무엇도 너를 붙잡을 수 없는 곳에서 순간마다에 머물 수 있기를 기원할께. 부유하더라도, 네가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아름다울 거야."






2006.08.01 18:42


  동갑내기 현호는,

  작년 말부터 어른이 되었다.고 말했다. 충무로에서 냉면을 먹고 있을 때였다. 녀석이라면 그럴만 하다. 정확하게 어른이 된 시점을 알고 있는 녀석에게, 나는 깜빡 잊고 어른이 되던 그 순간의 반짝이는 감각을 묻지 않았다. 아마 현호가 냉면값을 치뤘다.


  아직 어른이 된 것 같지 않은 나는,


  두 달 임대료를 겨우 치뤘다. 지난달 1일에 줄 돈인데 한 달을 늦추었다. 돈 받기로 한 거래처가 부도가 나서 만 원을 못 받았고 더 기다릴 수 없어 집에 부탁했다. 부끄러웠다. 두 말 없이 보내주시는 어머니 때문에 고맙고 미안해서 울컥했다. 금고에는 잔금 2000원이 있다. 지난달 찍었던 잔금 1500원을 오늘 받아왔다. 내일 4400원을 마저 받고 여행기사와 인터뷰 기사값 800원을 받아야겠다. 손님 올 때마다 내 책상 한 켠에 일회용 컵 놓아 맞는 것이 참 많이 미안한 지도 오래 되었는데, 이번에는 작은 테이블을 사야겠다. 1200와트 조명과 대형 반사우산이 필요하고, 시사메거진도 아니면서 2,5,8,0 번이 잘 안 눌러지는 휴대폰도 바꾸어야 한다. 더 몸 다치기 전에 근처 작은 아파트라도 구해야 하고 소품으로 쓸 배경지며 소소한 꾸러미들도 구해야 한다. 작업에 필요한 LCD 모니터도 나름 급하고 100mm macro 렌즈도 어서 꾸려야 한다. 구베이에 다녀 오느라 택시값으로 50원 가까이 쓰고 사진 프린트 비용으로 280원을 썼다. 6월 전기세와 수도세는 224원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분홍색 배경지를 사러 가야한다. 배경지는 270원이다.


  꿈만 꾸며 살 수 있는 땅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나마 하루 세 끼 식빵을 면한 것이 이제 겨우다. 열악한 환경과 박봉을 견디는 것은 꿈을 꾸는 대가라고 했다. 하루하루 힘에 겨워 걷는 걸음은 어떤 숙명적인 고난이 아니라 다만 숨쉬며 살아가고 있다는 맥박같은 것이어서 별로 싫거나 두렵거나 어렵지 않다. 적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길 위에 있고 매 순간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걷는지 뚜렷하게 알고 있다. 적어도 이 길은 누구에게 떠밀려 온 것도 아니고 아무런 선택의 대안 없이 내게 던져진 것도 아니다. 삶 속에서, 선택의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에게 있는 선택의 권리를 자각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자신에게 선택할 권리 따위는 없다며 자조 섞은 목소리로 주저 앉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디에나 있는 어려움이라면, 어디로 가도 맞딱뜨릴 벽이라면 적어도 원하는 길 위에서 만나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비로소 어려운 쓴맛 속에서 없는듯 가려진 단내를 즐길 수 있지 않겠나?


  다행인 것은,

  점심 때 만난 쯔쯔는 단사진 가격에 대해 물었다. 잡지 기준으로 알려주니 고객에게 이야기할 때 더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게 노력해 보겠다고 말했다. 친구 소개로 만난 디자이너는 카탈로그 촬영 가격을 물어 왔다. 데이페이 기준으로 알려주었다. 그 가격대로 클라이언트와 접촉해 보겠다고 말했다. 두 명째 촬영이 끝난 K1필름측에서는 사진에 아주 만족해 주었고 당분간 추가 촬영이 이어질 거다. 부도가 난 업체는 꼭 돈 주겠다고, 기다려 달라고 전화해 왔다. 느리기는 하지만 작업실에 작은 식구들이 하나 둘 불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내 자신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사진에 대한 세부적인 기술에 조금씩 더 확신이 생겨나고 있다. 결코 돌아서서 주저 앉지 않겠다는 다짐이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몸 아플 때마다 염려해주고 도와주는 좋은 벗들이 한가득이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괴력의 태풍  때문에 여기 먼 바다까지 떠밀려와 한 치 앞 안 보이는 풍랑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정의되지 않은 광활한 바다에서 풍랑과 어울려 보고 싶었다. 의지로 돛대를 세울 때 비로소 바람이 온다. 그래서 지금 나는 바다에 있다.


  대충 살지 마라.

  

  




  



2006.07.31 21:24


  "낡은, 아주 낡은, 그래서 가아끔씩만 제정신을 차리는 노란색 필라멘트 전구 같아. 길게 까암빡거리며 겨우 응답하는 불빛. 여리고 질긴 생명같은 거 말야."

  "여리고 질긴…"

  "응, 여리고 질긴 생명. 대견하고 가여운 생명"

  "대견하고 가여운…"


  '말꼬리가 길게 남는다.'


  "네 메아리가 공중에서 모여. 허공을 감싸서 존재를 만들어. 감싸고 있는 바깥 것들을 가리켜 존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본래 없는 것을 덮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으니까 흉을 보아야 할까? 태생에서부터 빈 것들. 그것들이 아우성 쳐."





2006.07.23 19:43


  날 저물어 간다. 어두워가는 하늘 가운데를 박쥐들이 난다. 네 시간을 작정했던 촬영은 오전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다섯 시에 끝났다. 카메라 앞에 섰던 모델도 모델 데려온 클라이언트도 만족하며 돌아갔다. 온 몸이 땀으로 젖어 몇 장 지폐를 받아들었다.


  .

  .


   공항 가는 버스에 앉아 책 첫 장을 연다. 제목 밖에 없는 너른 페이지 아래에 -2005. 봄. 남한강- 이라고 낯익은 글씨로 적혀 있다. 얼른 책 윗쪽을 보니 내 싸인도 없다. 아, 이 책 내가 산 게 아니구나. 예상 못 한 곳에서 비어져 나오는 기억이 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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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국내선 비행기를 타는 것은 처음이다. 대합실의 사람들은 시내버스 기다리는 줄을 닮았다. 뜨는 비행기가 많아서, 비행기 안에 앉아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비즈니스석에서 높은 목소리도 따진다. 부지런히 어디로 전화도 한다. 그런다고 비행기가 뜨겠나? 거칠게 부풀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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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땅에 갈 때 기대하는 것은 그 땅의 빛과 냄새 따위의 것들. 사람은 어디나 다르지 않았고 가려서 뽑아놓은 풍경은 감상까지 선택해서 준비해두고 있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길이 한 걸음씩 쌓일 때마다 더욱 기대게 되는 것은 낯선 빛과 냄새, 땅의 기운 따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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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도기를 쓰지 않은 지 일년쯤 되었다. 근래에는 한 달에 서너 번, 가위로 자른다. 얼굴을 더듬어 보면 양쪽 수염은 길이가 다르다. 오른손을 쓰는 내게 왼편이 조금 더 수월하다. 그래서 언제나 오른뺨 수염이 조금 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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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좋은 관찰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문장의 적절한 무게를 알아야 한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 하는 문장은 드라마 속 눈물처럼 가볍기 쉽고, 속에서 여물다 못 해 삭아버린 문장은 과장해서 무겁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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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과 땅은 겨루며 오지 않는다. 사람과 풍경은 덤벼드는 따끔거림이 있어서 애써 찾고싶지 않고 할 수 있으면 피해 걷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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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는 유일함. 또는 최소한의 희소성.을 전제하고 있다. 꼭 같은 것을 꼭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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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 창문 멀리 아래로 땅이 보였다. 땅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이었고 흐렸다. 중에 햇빛을 받은 부분은 노란색을 조금 섞은듯 했고, 그늘진 부분은 검은색에 더욱 가까웠다. 높이 올라와서 보면 땅 가운데로 긴 선들이 흐르는데, 곧게 뻗어 사방을 찌르고 있는 것은 길이었고 상처난 땅을 에돌아 나가며 어루고 달래는 것은 강이었다. 꼭 같이 길게 늘어선 두 선의 쓰임새가 그렇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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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편은 소용없다. 계통은 힘이다. 문장도 사진도 생각도 삶도, 의지를 가지고 모여 설 때 의미를 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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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을 읽으며 문장의 실체를 생각한다. 김훈의 문장은 존재의 근원을 향해 곧장 찔러들어가지 않는다. 주변을 에돌며 더듬어 살핀다. 애써 찌르지 않고 찾아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 존재의 실체를 구하지 않는 문장은 그러나 명백하고도 선명한 실체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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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 들고 골목길 들어설 때 한 마리 난삽한 들개가 되어 나는 부끄러웠다. 들개떼의 허기는 만족을 몰랐다. 탐욕만 그득한 눈빛은 어디에도 머물지 못 하고 떠돌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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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파하. 바다 海를 이름으로 쓰는 땅. 해발고도 3300m의 산 속에 바다같은 초원이 펼쳐 있다. 경계 없는 초원을 구경하기 위해 관광객이 오고 관광객을 받기 위해 주차장이 생겼다. 주차장 이외의 지역에 정차하면 벌금을 부과한다. 사람들은 주차장을 중심으로 부채살 모양으로 퍼져나갔다. 살들이 뻗어간 사이를 바람이 불어와 채웠다. 사람들은 초원 곳곳에 점으로 박히고 너른 초원은 그렇게 거대한 바람이 된다.

  처음 이 초원에 발 디딘 인류는 무엇을 보았을까? 준비된듯 마련된 광활한 초원에서, 존재가 존재를 처음 대면한 그 날은 어떤 날이었을까? 큰 바람이 불고 마른 하늘에는 천둥이 쳤을까? 하늘이 양편으로 갈라지며 큰 빛이라도 내려왔을까? 짐작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적어도 평범한 하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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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치는 것들은 머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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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전통옷을 입고 나와 사진의 화려한 모델이 되어주고 돈을 받는다. 돈 달라는 어린 목소리가 잔인할 것도 같지만 그 얼굴이 돈을 알아 탐내는 것 같지는 않다. 돈 받기 전에는 얼굴을 가려 렌즈를 피하고 돈을 받고서야 비로소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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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남에 있는 티벳사원 근처에는 언제나 까마귀가 날고 있다고, 현지에 익숙한 분이 알려주셨다. 사원은 고원 평지의 가장 높은 곳에 우뚝 빛 받고 섰다. 황토색으로 빛나는 사원 담벼락 아래 앉아 있다. 맑은 하늘은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한다. 호랑이 시집가는 날. 비는 방수 겉옷 위를 튀기듯 때리고 고개를 숙이면 마른 바닥에는 까마귀 그림자가 사방으로 날았다. 

  공간 속에 머물지 못하고 스쳐가는 것은, 그렇게 스쳐가며 남긴 기록들로 머무름의 이야기를 흉내낸다는 것은 참과 거짓의 이야기 이전에 참 슬픈 일이다.

  빗방울 속에는 제법 먼 곳에서 아니면 가까운 곳에서 날아왔을 모래가루들이 들어 있었는데, 외투를 두드리는 소리가 모래의 것인지 물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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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에 가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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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내려보면 마을은 벌레 먹은 흔적 같기도 했다. 좋은 마을은 나아가고 물러서는 데 억지스러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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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하늘 가운데서 구름을 내려보았을 때 구름은 끝 없이 즐거운 놀이터 같았다. 포근하게 온 몸을 감싸는 무중력의 구름 안에서 영원히 놀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구름은 발이 푹푹 빠지는 무중력의 모래사장일 것이다. 걸음걸음 디딜 때마다 온 몸을 묻어버릴 듯 빨려드는 늪 속에서 어떻게 저 끝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닿나? 이제 구름 속에 있는 꿈을 꾸는 날이 오면 다음날 아침 이렇게 말하게 될 지도 모른다.

  "악몽을 꾸었어."


  .

  .


  조금 정리된 마음으로 여행길 메모를 옮겨둔다. 다음달 여행기사 쓰기로 했는데 가져온 메모는 온통 잡스러운 것들 뿐이다. 찍어온 사진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배운 설명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은 없고 모조리 야릇한 것들만 있다. 

  아, 여행기사는 뭘로 쓰나.






2006.07.02 17:25


  "어머니, 어떡하면 좋아요? 사는 게 너무 난삽해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벗들은 여행 떠났어요. 멀리멀리 간다고 했어요. 한 달만큼 다녀보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나는 어쩐지 벗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별은 아닐 거예요. 그렇죠? 고인 물 속으로 돌아오지 말고, 영원히 길 위에서 생선처럼 팔딱였으면 좋겠어요. 검게 그을린 얼굴과 한결 단단해진 걸음으로 돌아오는 벗들을 보면 나는 어쩌면 슬퍼질지도 몰라요. 아주 조금이겠지만 말이죠. 무사히 돌아온 반가움이 금방 묻어버리겠지만 말이죠. 나는 어쩌면 슬퍼질지도 몰라요."


  "멈추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오늘은 어제보다 나아야 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몇 걸음 더 디뎌야 한다고 했잖아요. 어머니, 꼭 그래야 해요? 여기, 잠시 멈추면 안 되나요? 오늘도 걷고 있는 저들은, 정말로 나를 짓밟을까요? 내가 멈추면 저들은 기다린듯 나를 앞질러 걸을까요?"


  냄비에 밥을 짓기 위해서는 우선 바닥이 두껍고 속이 깊은 냄비가 필요하다. 센 불로 먼저 끓인 다음 중간 불로 10분 이상 끓인다. 마지막 10초 가량 다시 센 불로 끓인다. 다시 10분 가량 뜸을 들인 후 주걱으로 저어 준다.


  엡손 R4800. 돈 생기면 살 프린터. 기약 없는 찜. 



2006.06.28 10:43


  퍽.

  "아야.!"

  "괜찮아? 저런, 피 난다."

  "깨졌어. 잠깐 딴 생각하느라 손에 들고 있다는 걸 잊었어. 힘이 빠졌나 봐."

  "그걸 왜 손으로 집어. 빗자루로 치워내면 될 걸 괜히 피를 봐."

  "응. 붙잡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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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스장 가는 길에, 목줄도 없는 개 한 마리가 횡단보도 옆 벽이 만드는 그늘에 서 있었다. 더워 보였다. 잘 먹지도 못 한 것 같았다. 녀석은 제법 앙상한 몸으로 꼬리를 다리 사이에 숨긴 채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위협하기에는 지쳐 보였다. 지쳐서, 사방을 위협으로 느끼는 것 같았지만 녀석은 그늘을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헬스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목줄 없는 회색의 개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이번에는 바닥에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일정 거리를 두고 경찰 세 명이 그 주변을 둘러 싸고 있었다. 경찰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그렇듯 일단의 군중들도 함께 모여서 개를 보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개를 기르려면 매년 일정 금액을 납부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은 미등록의 개는 끌고 가서 도살한다는 기사가 기억났고, 기사와 함께 실려있던 죽은 개, 죽어가는 개, 죽이는 사람 사진들이 목줄 없는 개의 영상과 겹쳐졌다. 그 자리에 조금 더 서 있는다면, 몇 명의 전문가들이 와서 개를 개잡듯 포획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신호등 파란불을 확인하고 길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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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분석해둔 책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 대중은 현명한가? 대중은 멍청한가? 대중은 언제나 대중인가? 대중이지 않은 존재들의 집합이 대중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중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표면적이다.라는 점인데, 다빈치 코드.의 성공에 대해 나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위대함에 바치는 역사적인 헌사들은, 적어도 다빈치 코드.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물론, 다빈치 코드는 아침부터 밤까지 나를 붙잡아 둘만큼 재미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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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추어 있는 것은 계속 멈추어 있으려고 하고, 움직이는 것은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한다. 뉴턴. 관성의 법칙.은 과학적인 수식을 빼고 본다면 익숙함.에 관계된 문제다.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역치 이상의 자극이 필요한데, 자극을 받아 운동.한다고 해도 관성에 의한 버팀.이 생긴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거나 변화를 추구하고자 할 때 마주치게 되는 주저함, 괜히 길을 나섰다는 후회같은 감정들이 모두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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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자 기간이 곧 만료된다. 너무 늦게 알았다. 순조롭다면 주변 회사를 통해 취업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7월에 운남으로 떠나는 일정 때문에 자칫 시간이 모자르게 되면 한 번 더 여행비자를 신청하는 방법 밖에 없다. 어쩌면, 운남으로 가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각해야 한다. 1년.이 되어 간다.





2006.06.27 13:45


  새벽의 하늘은 버거울만큼의 무게를 이고 있었다. 헬스장 나오는 길에 만난 하늘은 이미 흐릴 대로 흐렸고 바람은 태풍이 온 것처럼 세찼다. 대기는 낮은 구름들에 잔뜩 눌려 있었는데 바람은 그 사이를 오가며 근근 버티고 있는 녀석을 또 흔들어댔다. 계란프라이 하나와 두유를 사서 나올 때쯤에는 이미 한두 방울 비가 내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곧 쏟아져내릴 폭우를 예상하고 뛰다시피 걸었다. 근처 과일가게에 들러 과일을 사야 할까? 아니면 그냥 가야 할까? 걷는 내내 시간을 계산했다. 과일가게에 들러 과일을 사는 데는 돌아가는 길에서 보낼 시간까지를 합쳐 오 분 정도가 추가될 것 같았고, 낮은 하늘과 달리 비는 순간에 강도를 더할 것 같지 않았다. 며칠 째 몸에 가득한 열기를 내리기 위해 수박을 사고 싶었지만 냉장고도 없는 작업실에서 수박 한 통을 해치우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오렌지로 바꾸었다. 잘 고른 오렌지 네 개는 18.2원인데, .2원을 깎아주어 18원만 내고 샀다. 기억하고 있던 액수와 달라서 속으로 당황했다. 가격을 미리 알았다면 조금 더 싼 과일을 골랐을 것이다. 오렌지를 사서 작업실로 돌아오는 마지막 1분 가량은 결국 뛰어야 했는데, 막 샤워를 끝낸 몸은 땀과 비로 약간 축축해졌다. 


  다행히 회복기로 접어들었다. 반환점은 언제나 최악이다. 합당한 인용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새벽이 오기 전, 하늘은 가장 어둡다고 하지 않던가. 도저히 버틸 수 없어 택시를 타고 복단대 근처 한국식당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평소 잘 먹지 않는 매운 음식은 아플 때마다 참기 힘든 유혹이다. 고추장 된장 찌개를 시켜 간장종지같은 밥 두 그릇을 먹었다. 1주일 만에, 두 그릇을 다시 비울 수 있게 되었다. 은경 누나네에서 저녁으로 해물잡탕을 얻어먹었다. 사람들과 게임하며 놀다가 먼저 잠들고, 평소 아침을 간소하게 먹는다는 누나는 부러 거한 아침을 차렸다. 영숙 누나네에서 석고 조금 발라주고 한숨 얻어 잤다. 방은 물론이고 거실까지 에어컨을 가득 켜 주어서 이불 감고 잘 잤다. 까르푸에서 초밥 세트를 사다 주어 맛있게 먹었다. 저녁에는 작업실 디렉터 세은누나가 닭죽을 만들어다 주었다. 요리도 안 하는 사람이 애썼다. 이제껏 한 번도 맛 본 적 없는 닭죽이었다.고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못 얻어 먹을 지도 모른다. 


  종일 선풍기 앞에 엎드려 빌려온 소설을 읽다. 다빈치 코드. 너무 유행하는 소설은 되려 거리를 두게 되는데, 어떤 알랑한 존재의 유일성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다. 소설의 모더니즘.에 충실한 이야기다.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과 닮았다. 그러나 현대예술에서 장르는 의미가 없다. 김훈의 새소설집은 그 한 가지 예가 될 만한데, 사진의 본질적 특징 중 하나인 불연속성(존 버거)을 문장에 활용하면 독특한 느낌의 소설을 만들 수 있다.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근대소설 (또는 근대적 성격을 갖는 현대소설)과 달리 불연속성.의 소설들은 문장을 이미지화 한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시작이나 완결은 더 이상 필수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소설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 기능을 수행하며 독자의 개인적 역사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의 품이 다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장치는 작가의 철저한 의도를 따른다.


  이미지화 된 소설.에 대한 평론을 써 볼까? 어제 밤 잠들기 전에 생각했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평론들을 구해서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책을 검색해 두었다가 한국 다니러 가는 사람에게 부탁할 생각이다.


  명색 사진가라는 녀석이 맨날 문장만 잡고 논다. 어머니는 내가 작은 실수를 했을 때나 큰 실수를 했을 때나 한결같은 반응이셨다.

  "참 자알 했다."

  거기에는 약한 강도의 질책과, 더 큰 강도의 격려가 언제나 함께 했다. 사진가가 맨날 문장으로 놀아도, 참 자알 하는 것이다.






2006.06.26 21:41


  "반환점을 돌았어. 이제 나는 나아질 거야. 많이 아플 땐, 걷는다는 건 물론이고 버티고 서 있기조차 힘들어. 그럼 살피게 되는 거야. 꼭 붙들어야 하는 것들만 빼고 하나하나 내 손에서 놓여나도록 힘을 빼지. 처음에는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도 하루 이틀 계속 아프다 보면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돼. 그랬었어. 몇 번이나. 그렇게 허물벗듯 아쉽게 내려두고 돌아나오곤 했던 거야. 아쉽게. 아플 걸 알면서도. 돌아가서 다시 붙들 수 없을 걸 알면서도."

  "꼭 필요한 것만 갖고 살 수는 없을 텐데. 아름다움이란 기능성 너머의 무엇이라고 말한 건 너였어. 독자적인 호흡을 운운하고 아름다움의 가치를 과장한 것도 너였어. 왜 그게 한 순간 필요 없는 게 될 수 있지?"

  "그 기준이 기능성은 아닐 거야. 그리고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건 의지가 관할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지. 자연스러운 거야. 바다도 가끔 그렇게 몸을 털고 산도 계절을 바꾸며 온몸을 떨구어 내. 늦은 가을 밤길을 도와 산에 오르면 산이 온몸으로 떨쳐내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어떤, 비명같은 소리지. 그 목적지가 선형적인 시간의 도달점인지 원형적인 시간의 순환고리 속에서 같은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건 어떤 비명.같은 거였어. 단호하고 허허로운 비명 말이야."

  "네 결론이란 것들은 모조리 순간적인 반응 뿐이지. 무섭니? 담담한 너는 어느 때보다도 더 불안해 보여. 애써 규정지으려는 모습. 모든 게 네 의식 속에서 줄 맞춰 서 있기를 바라지. 잘 정리된 서고書庫같이. 언제든 원하면 마음대로 찾아볼 수 있어야 하고 일말의 혼돈도 허락할 수 없겠지. 그래야 그 안에서 비로소 너를 규정지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거, 네가 불안하다는 거야. 사랑한 거 아니었나?"

  "사랑.이라는 단어로 말할 수는 없는 시간들이었어. 하지만 그 시간을 설명할 때 사랑.이라는 단어를 빼고는 불가능한, 그런 거야. 사랑? 사랑은 언제나 상호적인 감정이라고 확신했어. 물론 그게 목숨을 걸고 다음에 올 모든 것들을 저당잡힐 만큼 거창할 필요는 없겠지. 사랑이 하찮은 게 아니라 작은 감정들이 하찮을 수 없는 거야. 유별난 건 아니야. 어떤 대단한 결심도 아니야. 머리카락을 자르는 건 어쩌면 화려하고 거대한 제의.같은 거야. 존재의 의미를 창조하고 확대하는 그럴듯한 허풍 말이야. 만나고 헤어지는 건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해. 무엇이 되기 위한 과정인 것도 아니고 완성으로 가는 어떤 단계도 아니야.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게 성공, 중간에 이별하는 게 실패라는 따위의 공식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거지. 그냥 만나고, 그냥 헤어지는 거야. 그 자체로 의미고, 그 자체로 가치야."

  "변명이야. 도망치지 마. 어디에서든, 어디로든. 어울리지 않아."

  "도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래서 강을 뒤에 두고 서는 거야. 단호하게 끊고 나아가지 않으면 도망이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돌아갈 길을 끊는 거야. 변명일까?"








2006.06.25 10:54


  "싫어."

  "입어."

  "싫어."

  "투정부릴 때가 아냐."

  "나아가던 것도 다시 아플 것 같아. 통 넓은 소매, 도대체 만든 사람을 의심하게 만드는 패턴디자인, 목에서 허리까지 한 번에 똑, 떨어지게 만드는 어깨선. 이건 정말이지 환자의 회복을 더디게 해서 조금이라도 더 병실에 붙잡아 두려는 현대의학의 음모야. 알아? 환자복을 입는 순간에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 당하는 기분이 돼. 삶에 대한 작은 의지까지 모두 하얀색 병동에 저당잡히고 일체의 자발성도 금지 당하지. 내 존재는 없어지고 그냥 한 명의 환자만 남는 거야. 싫어. 명백한 음모야. 병든 기운을 이렇게 모조리 모아둔 곳이 환자의 회복에 좋을 까닭이 없어. 단지 격리시켜서 사회를 순조로워보이게 하는 게 전부야."

  "평소에 잘 했어야지. 지금 네 몸으로는 차라리 아무 의지도 없는 게 나아. 할 수 있는 거라곤 겨우 버티는 것 밖에 없는데 뭐. 괜히 악으로 버티려고 하지 마. 한 번쯤 세상에서 버려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거야. 적어도, 아직은 돌아갈 기회는 남았으니까. 마지막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존재까지 거부당하는 사람들도 많아. 그런 사람들에게는 동정하는 것도 미안해. 괜히 생색내는 것 같거든. 얼른 입어. 나아서 돌아가야지. 나아서 다시 네 옷 입어야지."






2006.06.24 09:09


  "좀 어때?"

  "나아졌어. 아주 조금이긴 해도. 겨우이긴 하지만 걸을 수 있겠어.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긴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는 것 같아. 아침 산책도 마치 10 년도 넘는 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야. 이제는 저만큼 앞에서 신호등 파란 불이 깜빡거려도 뛰지 않게 됐어. 천천히 겨우겨우 걸어서 다음 신호를 기다려."

  "애써 아름답게 보려고 하지 마. 지금 너는 정상이 아니야. 얼른 나아야지. 많이들 걱정해. 아침 표정에는 네 하루가 보여.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좋은 꿈이라도 꾼 것처럼 밝은 날은 네 컨디션이 모처럼 좋다는 뜻이지. 그 표정을 보면 기쁘다가도 얼마만에 보는 건지 생각하면 다시 씁쓸해져."

  "의미가 없는 존재는 존재할 의미가 없는 걸까? 많이들 걱정하니까, 나는 얼른 건강해져야 할까? 여신女神은, 참 불행했겠다.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의 밖에서 구해야 했을 거야."

  "여신은, 얼어죽을. 밥이나 먹어."





2006.06.22 21:23


 "오랜만이야. 박쥐를 보는 건. 해가 지고 아직 하늘 끝편으로 색이 남아있을 시간이면 박쥐는 동네 하늘을 실루엣으로 날곤 했어. 어쩌다가는 가게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는데, 온통 환한 실내에서 녀석은 무척 당황하는 것 같았지. 창문에 몇 번 머리를 박으며 녀석은 점점 지쳐 갔는데, 그렇게 겨우 매달린 녀석을 잡은 적도 있었어. 살려보냈던가? 죽였던가? 기억 나질 않네."

  "여왕개미네?"

  "며칠 전에 살려보낸 녀석이야. 무거운 몸통을 이끌고 왔었어. 아마 몸 가득 알을 품고 있었겠지. 여왕개미가 수컷의 정액을 받는 건 꼭 강간당하는 인상을 줘. 이미 배가 불러와서 땅에 겨우 끌고 다닐 것 같은데도 수컷들은 계속해서 사정해. 왜일까? 여왕개미를 보고 있으면 목적지나 정착지가 없는 것 같지. 항상 떠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떠돈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닐 거야. 정착해야 할 것들에겐 슬프겠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떠도는 것들은 부유.라는 게 슬플 것도 나쁠 것도 없겠지."



  반군은 이야기 연습중. 나중에 나중에는 소설을 써야 하니까. 그런데, 이런 문장은 상당히 지저분하네. 배설같은. 나는 좀 더 좋은 문장을 써야 하는데.






2006.06.22 21:04

고등어 찌개




  젖가락을 들어 살찐 고등어 토막을 집었다. 온통 빨간 찌개 국물 사이로 투명한 김치 조각도 보였다. 참 맛있어서, 이제 주말마다 집에 와서 밥을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깨었다. 꿈이다. 원숭이에게 쫓겨 강둑에서 떨어지던 어린 꿈 이후로, 참 오래 남는 꿈이다.


  "상하이를 떠날 거야."

  "왜? 갑자기."

  "그냥. 혼자 이 곳에서 생활하는 게 견디기 힘들어졌어.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부모님이 계신 곳."

  상하이에는 처음 왜 왔던 거냐고, 이 땅에 올 때 네 꿈은 무엇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묻지는 않았다. 잔인해 질까 무서웠다. 모두가 나와 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예쁜 모델은 이미 많아."

  "뭘 보고 싶다는 거야? 내 안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화난 표정이 없는 걸. 난 잘 화내질 않아."

  "그래, 예쁜 것들은 세상 사는 곤란이 아무래도 적지. 비교적."

  스스로가 예쁜 것을 아는 모델은 좀처럼 예쁜 표정을 벗겨내지 못 한다. 울어도 예쁘고, 찡그려도 예쁘다.

  "모델의 표정은 층을 가져야 해. 화를 내도, 그 표정 속에는 여운이 남아야 하는 거야. 단지 화를 낸다는 것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왜 화를 내는지 궁금하게 만들고, 나아가서 보는 사람이 개인의 경험까지 이입시킬 수 있는 공간을, 너는 네 표정 속에 배려해야 해. 모델은 온몸으로 표현해야 해. 예쁘기만 한 모델은 많아. 네 색깔을 만들려는 노력이 없다면, 너는 그냥 편하게 그렇게 살아버려도 좋아. 괜히 고민하지 마. 금방 잊혀질 거야."

  의자 위에 앉아 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듣던 모델은 슬그머니 내려와 옆에 쪼그렸다. 너는, 궁금하지 않니? 네 한계 너머에 있을 다른 너.


  최고 기온이 35도를 넘었다. 삼 일째다. 작업실은 찜통만큼 덥다. 한 번 가둔 열을 내보내지 않는다. 작업실은 길보다 덥다. 아침마다 베개는 온통 땀이다. 저녁에는 샤워 못 한 몸으로 잠든다. 밤 10시면 헬스장은 문을 닫고, 겨우 샤워해도 작업실도 돌아오는 동안 옷은 젖는다. 어제 오늘은 다행히 촬영이 있어 에어컨을 틀 수 있었다. 위험한 여름이다. 좋지 않는 컨디션으로 나기에는 버거운 여름이다. 나는, 무섭고 가엽다.


  고등어 찌개를 먹을 수 없다. 35도의 여름이 버겁다.  밥 반 그릇만으로 구토가 밀려와도.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 내 한계가 어디인지 궁금하고, 한계 너머에 있을 다른 내가 궁금하다. 그 녀석이 저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2006.06.15 21:04

제목, 그 딴 거.





  대기에 습기가 가득한 날 밤하늘은 흑백이 아니다. 색을 잘 못 맞춘 모니터처럼 약간 마젠타가 섞여 있는 것도 같고 옐로가 섞여 있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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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일 맨발로 다닌 발바닥은 온통 먼지다. 뽀드득 뽀드득. 두 발바닥을 마주 비벼대면 거친 마찰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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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 끈 작업실에 앉아 창문을 열고 크게 음악을 들으면, 자줏빛 구름을 뚫고 토토로가 내려올 것 같다. 끝내주는 배경지와 촬영소품, 브론칼라 파워팩 세트를 자루 가득 선물로 담고. 아, 작품을 프린트할 수 있는 좋은 프린터도 한 대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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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창문을 끝까지 열고 오렌지 쥬스를 큰 컵 가득 홀짝이고 있으면 강바람은 혼자 맞기에는 과분하다 싶게 아름답다. 








2006.06.14 22:41

작업실 옥상





한밤중에 하늘에게 물어보아도 별들만 반짝일 뿐 마음에서 흘러나온 물이 검은 호수로 흘러갈 뿐 다시 한 번 천사는 나를 돌아볼까 내 마음에서 물놀이를 할까 겨울 바람에 눈물이 흔들리고 어둠 속으로 날 인도하네 얼음같이 차가운 눈동자로 나는 점차 커 가고 누구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악취를 풍기는 보석


- 영화 <아무도 모른다> OST 중에.




  언제부터 일본 영화를 참 기대하고 보게 된다. 삶의 작은 틈바구니에서 읽어내는 의미는 보는 사람을 참 즐겁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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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가 강하면 이미지는 힘을 잃는다. 최근에 읽은 소설들 속에서, 제법 한참 전에 보았던 영화들 속에서 작은 답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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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은, 공간은, 사진은 아름다워야 한다. 기능성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호흡을 가질 때, 존재는 아름다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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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 둘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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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7월 중순에는 쿤밍에 가게 될 지 모른다. 사계절이 봄.이라는 윈난성. 그 성도가 쿤밍.이다. 내게는 모든 인연과 시간이 온통 기회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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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 물 속에 지느러미를 세운 채 있어도 답답하거나 조급하지 않다. 바람이 불고, 나는 바다로 갈 테다. 바다로 가서, 헤엄을 멈추면 호흡할 수 없는 참치처럼 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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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이상은 요즘 뭘 먹고 살까? 몇 줄 글에 달리는 엉뚱한 댓글들을 보며, 내 문장의 행간을 읽어내주던 친구 생각이 났다. 이 친구 오면, 기꺼운 마음으로 백주 뚜껑을 따도 좋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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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아직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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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더 줄여야 한다. 생각만으로, 말만으로 꿈꾸지 마라. 행동하지 않으면, 벼랑끝으로 몰아치지 않으면 아무 곳도 나서지 못 하고 아무 곳에도 닿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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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키라와 교코와, 시게루와 유키. 일본이라는 땅이 참 궁금하다.





2006.06.01 09:34

여섯 살






꼬마는 내 손등에 살짝 키스하고 갔습니다. 

아, 여섯 살 소녀의 고백 앞에서 나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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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좋은 점은 더욱 좋도록 애쓰고 나쁜 점은 줄일 수 있도록 애씁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쁜 점을 알면서도 끝간 데를 향해 더욱 몰아가기도 합니다

고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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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은 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2006.05.22 19:04


지갑을 잃어버렸다.


그래, 잘 되었다.

지난한 삶에 가끔은 매듭도 필요한 거니까.




2006.05.19 23:42


  작가는 의식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소재를 찾는다. 그러나 의식과 소재 사이에는 언제나 크거나 작은 간격이 존재하고, 이 간격은 작가의 의도를 왜곡 또는 변형시킨다. 설사 읽어내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작가의 의식을 가장 온전하게 대변하는 소재로서의 작가 자신은 커다란 가능성을 갖는다.


  작업실에 만들 흙밭 계획.

오늘 풀을 파는 시장에서 본 낮은 화분은 정사각형. 가로 세로 32센티미터. 테이블로 쓰려고 찜해둔 유리는 폭이 30센티미터. 토기화분은 한 개 가격이 80원. 7개를 사서 두 줄로 엇갈리게 놓기. 마음에 드는 풀들에게 찾아가 누추한 작업실에서 나와 함께 살아주지 않겠냐고 부탁하기.


  아, 흙이 없네.






2006.05.13 10:26


  아침에 손끝이 저렸다. 


  길 다니며 김훈의 새소설을 읽는다. 진중하게 앉아 읽지 못 하고 길 다니며 눈의 가운데는 책을 읽고 눈의 가장자리는 앞을 살폈다. 생각의 가운데는 행여 넘어지지 않을까 저어하고 생각의 가장자리는 문장과 이야기에 감탄했다.




2006.05.11 23:37


왕성한 호기심으로 매번 새로운 앎의 대상을 찾아나서는 정신의 여행자들에게,

망각이란 나아가는 속도만큼이나 빨라서.





2006.05.10 20:36


  누구를, 또는 어떤 존재를 미워한다.고 말하지 마라. 말은 마음을 만든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말하면 하게 되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면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숨이 끊기는 그 날까지 일생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미워할 작정이 아니라면 함부로 미워한다.고 말하지 마라. 말이 반복되면 기운이 동.하고 밉지 않을 일까지 미워진다.


아픈 일 많은데, 좋은 일 만들기도 부족한 시간인데.

그러니까, 미워도, 미워한다.고 말하지 마라.


- 지난 글.





2006.05.10 19:44





  면도했다. 오랜만이다. 방심한 탓에 두어 군데 붉은 빛이 돌았다. 상처. 상처는 힘이다. 날카롭게 베어나 갈라진 살갗은 더 큰 간절함으로 상대를 부여잡는다. 한 번 생겨난 상처는 매끈한 피부보다 자극에 약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상처는 간절한 껴안음이다. 양편의 살갗이 서로의 안까지 껴안아 만들어내는 흉터가 그것을 증명한다.


  내가 약한 것은 상처가 없는 까닭임을 오늘 비로소 알았다.


-지난 글.



2006.05.10 07:53


  칼.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던 무렵이 있었다. 망나니의 주변 없는 칼과 고수의 있는듯 없는듯 감추어둔 칼.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새삼 다시 칼.이 생각나는 것은 다시 한 자루의 칼을 품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 때 품었던 한 자루 칼은 내 사진 속에 내 글 속에 또 내 걸음 속에 오롯이 날 세웠다. 

  디테일에 집착하는 사진은 서툴고 얕다. 디자인을 거쳐 이미지의 사진으로 가기에는 아직 멀었지만, 적어도 닿아야 할 곳은 그 곳이다. 화려하기만 한 수식과 걸러내지 않은 잡설의 문장은 얕다. 안다고 말하기 위해 딛고 선 자리를 장식하는 문장은 거친 동시에 지루하고 읽는 사람의 살갗을 아프게 찌른다.  삶에 장식이 많은 사람은 얕다. 이미 오래 전에 목적을 잊고 대신 그 자리에 수단을 모셔둔 사람은 안타깝고 밉다.


내 사진은 내 문장은 또 내 걸음은

언제쯤이면 단순하고 담백한 그 곳에 가 닿을까.






2006.05.09 23:40


  랜즈는 한 장의 유리로 구성되지 않는다. 적게는 서너 장, 많게는 열대여섯 장의 유리가 합쳐 하나의 랜즈를 만든다. 빛은 유리를 통과하며 굴절되고 왜곡되고 퍼지고 모아진다. 필름에 맺히는 상은 굴절되고 왜곡되고 퍼지고 모아져 마치 본래의 빛인 양 담겨진다. 들어가는 유리가 많으면 빛의 손실과 왜곡이 크고 다시 그 왜곡을 보정하기 위해 새로운 유리를 넣는다.


  속에 담긴 생각이 말로 행동으로 걸음으로 나오기까지 몇 장의 유리를 거쳐올까? 순수인 듯, 진심인 듯 보이는 말과 행동과 걸음은 또 몇 장의 유리를 거치며 얼마나 진실을 가렸을까?







2006.05.08 20:14


여행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설사 매 순간마다 걷는다고 해도, 사실은 그 순간마다에 머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편한 숨을 한 뜸 한 뜸 심어가며 공간마다에 머물러 보면 그 안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2006.05.08 12:45


  책 정리했다. 책꽂이 가득한 책들을 한 권 한 권 꺼내 제목을 받아적고 작가이름을 받아적었다. 존재를 몰랐던 책과 존재를 잊었던 책. 새삼스럽게 손에 잡혀드는 책들은 제각기 사연을 품고 있었다. 어떤 책은 페이지 사이에 쪽지를 끼우고 있었고 어떤 책은 표지 속에 철지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꽃잎처럼.


치옥 동무!

꽃잎처럼 살자

1997. 5. 2 성욱 동무가.


  다음에 다음에 겨우겨우 인연이 닿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 때는 물어보아야겠다.

'성욱아, 우리 꽃잎처럼 살고 있나?'


  글을 위한 공간을 다시 배려한다.

간절했다.






2006.05.07 11:21


  녀석과의 작별인사는 언제나 일말 비장했다

그 순간은 매번 내게 하니의 의식같은 것이었는데,

비장함으로 날 세운 것도 돌아서 그 무딘 날을 보는 것도 언제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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