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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유적지, 강태영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항몽유적지가 있다. 몽골의 고려 침략에 맞서 싸운 삼별초가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곳이다. 흙을 쌓아올린 토성과 주춧돌만 남은 건물의 유적이 있다. 계절마다 여행객이 많이 찾는데 그들이 유난스러운 역사의식이 있어서는 아니다. 항몽유적지 곳곳에는 계절마다 색색의 꽃밭이 펼쳐지는데 여행객들에게는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사진 촬영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쁜 풍경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 땅에 깃든 이야기를 멀게든 가깝게든 만난다. 고리타분한 역사의 흔적을 어떻게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려는 노력이 보기 좋다.


항몽유적지가 이렇게 변한 것이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는 강태영이 있었다. 계장님, 소장님, 선생님 등 여러 호칭으로 불렸던 그는 매번 항몽유적지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태면서 지금의 그곳을 설계했다. 해마다 이번에는 어느 밭에 어떤 꽃을 심을 지, 길 건너 예쁜 참빛살나무 숲을 항몽유적지 이름으로 구입해서 계속 유지할 수 없을 지, 포토존을 어떻게 만들어 사람들을 좀 더 불러모을 수 있을 지, 토성 둘레길을 둘러보는 답사코스를 좀 더 보강할 수 없을 지, 플리마켓을 유치해서 재미난 이벤트를 만들 수 없을 지, 항몽유적지를 좀 더 잘 보여주는 사진을 어떻게 찍을 지,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이 땅에 깃든 정신을 더 널리 알릴 수 있을 지 고민했다. 


항몽유적지 주차장에서 북쪽 바다 방향으로 내려가면 작고 낡은 창고 건물이 하나 있다. 언덕 정비사업을 진행할 때 본래 철거하려던 것을 살렸다. 그리고 간단히 정비한 후 내외부에 항몽의 느낌을 전하는 글귀를 적었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섬 제주,

두려움과 희망은

늘 바다 너머서 밀려왔다.


그날 하늘은 파랗고 땅은 붉었다.

그리고 자당화는 고왔다.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오는 그 날의 풍경을 적은 글귀는 강태영이 지은 것이다.


그를 오래 알고 지낸 것은 아니다. 많이 만나거나 길게 함께 머문 것도 아니다. 프로젝트 제안 때문에 처음 만났고, 사진관에서 진행한 사진수업에 참여하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으러 나가고는 했다. 항몽유적지 산책 때 잠시 이야기 나누거나 그가 올리는 블로그 포스팅을 보면 대충 짐작은 된다. 그는 진심으로 일하는 사람이고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고 또 실력있는 사람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종종 뵙고 여러 가지는 배울 수 있겠다 싶었다. 


늦은 밤에 자려고 누웠다가 부고를 들었다. 오래 알고 지낸 것이 아니어서 어떤 상황인지 몰랐다. 예전부터 아프셨던 모양이다. 사진 수업 중반 이후에 입원하셨는데 얼른 나으셔서 다시 오시라고 통화했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한참 뒤 항몽유적지 행사장에서 만났는데 많이 수척하셨다. 말랐기는 해도 어떻든 병원 생활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시는 모양이다 싶었는데.


컴퓨터를 뒤져서 외부촬영 수업 때 무심코 찍어두었던 사진 두 장을 찾았다. 작게 프린트해서 장례식장에 있는 가족에게 전했다. 선생님은 아프신 중에도 반치옥사진관의 사진수업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러셨구나.



세상을 조금 바꾼 또 한 분을 기록해 둔다.


강태영 선생, 돌아 가시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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