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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선생님을 소개시켜 주세요.





인상적인 공연을 보거나 특별한 이야기를 듣거나, 좋은 음악을 듣거나 깊은 감동을 받으면, 


아, 저 사람 꼭 찍어보고 싶다.


생각이 든다. 내가 찍으면 저 사람 참 특별하게 찍어낼 수 있는데. 나만 찾아낼 수 있는 윤곽과 표정이 있을 텐데. 생각이 든다. 찍고 싶다는 갈증을 느끼면서 나, 점점 진짜 사진가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강요배.


찜했다. 처음 그림을 본 게 상하이 학고재에서 있었던 전시였다. 벽 하나 통째로 채운 바다 그림이었다. 마침 제주도 이주를 준비하던 때였으니까, 제주도에 가면 꼭 만나보고 싶다,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사 준비로 잠시 제주에 들렀을 때 마침 도립미술관에서 강요배 개인전이 있었다. 한쪽에서 화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었는데, 화가는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업실을 두고 있었다. 제주 4.3을 다룬 그의 초기 작업도 봤다. 바다로 걸어가는 저 얼굴을, 느긋하게 한 일년쯤 따라다니면서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빈 캔버스 앞에서 찍고, 물감을 개고 있을 때 찍고, 전시 준비중인 텅빈 갤러리에서 찍고, 산책가는 바다에서 찍고, 사나운 파도 앞에서 찍고, 물에 반쯤 담궈서 얼굴만 내놓고 찍고. 혼자 이런저런 구도를 상상하고 한 장 마다 어울리는 조명을 세웠다가 지웠다가 했다.


강요배를 취재해서 글쓴 사람을 발견해서 불쑥 연락했다. 


- 강요배 선생님을 소개시켜 주세요. 저는 사진찍는 사람인데요, 꼭 찍어보고 싶습니다.

- 아마 직접 연락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제주 화단의 어른이시라 그분 의견을 여쭤얄 겁니다.

- 건너건너 소개받으면 좀 쉽게 허락하실 줄 알았지요. 네, 알겠습니다.


대화는 대충 이렇게 끝났다. 장비는 상하이에 있고 찍고 싶다는 생각 뿐 찍어서 어디에 쓸지 생각도 없으니 당장에는 기약이 없다. 그래도 꾸깃꾸깃 접어 셔츠 윗주머니에 넣고 잊은 메모지처럼, 언젠가는 꼭 찍는다. 그런 그림을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끝내주게 찍어낼 수 있다. 그거 하나는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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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멜랑콜리 M/D Reply

    바다가 있어 그것을 그리고 싶고 그래서 그린 사람이라면
    정말 사진에 담고 싶은 피사체가 있어 그것을 찍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을까요?
    화백의 그림과 그의 사진이 콜라보되는 전시회도 멋지겠네요.

  2. 수입감자 M/D Reply

    지난 설에 한국 고향에 갔을때 20여년전에 구입했던 강요배님의 화집을 들고 왔습니다.
    제주의 자연을 그림 화집입니다.
    강요배 선생님에 관한 얘기가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댓글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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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재간

소소재간




친구의 작업실 겸 작은 매장이 문을 열었다. 소소하게 떡을 마련해서 동네 이웃들에게 돌리고 치열하게 만든 소소한 것들이 판매 테이블 위에 자리를 잡았다. 며칠 전 갔을 때만 해도 워낙 진도가 안 나가서 이게 도대체 약속한 날짜에 될 일인가 싶었는데, 둘은 어엿하게 예고한 날짜에 문을 열었다. 며칠 밤을 새웠겠지만.


그래피티 작업을 하던 한디와 옷을 만들던 아내는 제주를 기억할 만한 작은 것들을 만들고 모아서 가게를 열었다. 자신들처럼 수줍게, 가게 이름도 소소.한 재간.이란다. 예쁜 이름이다.


이 섬은 멋지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곳이니까 그런 사람들을 닮은 가게도 많다. 그것들 모두 제 색깔로 빛났으면 좋겠다.  제주 정착 넉 달 만에, 나도 지인 가게라고 소개할 만한 곳이 하나 생겨서 좀 뿌듯하다. 한 뼘쯤 더 제주사람이 된 것 같아서.


개업축하하러 가서 나는 잡동사니를 넣어다닐 작은 천가방을, 아내는 아이패드를 넣을 파우치를 샀다. 마루는 개업 파티용으로 준비해 둔 사탕을 여러 개나 먹었다.


소소재간. 소소한 빛들이 오후마다 재잘거리기를 빈다.


- 귀덕사거리에서 보면 그래피티로 벽을 채운 가게가 보인다. 당근케익 가게 옆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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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느리게 가는데 세월은 참 빨리도 간다.






얘야, 시간은 느리게 가는데 세월은 참 빨리 간다.


백발의 할머니는 이제 가끔씩은 치매 기운도 있다고 했다. 마냥 꼿꼿해 보이시는데, 어떤 날은 하루 열두 통도 넘게 전화하신다고 했다. 마침 찾아뵈었을 때는 가만 방에 앉아 계시다가 우리 일행을 보고 말씀하셨다.


시간은 느리게 가는데 세월은 참 빨리도 간다. 사는 게 그렇다. 


아직 세월을 살아보지 않은 나는 다만 그 말이 아름답게만 들렸다. 


그러게요, 할머니. 여전히 참 정정하세요. 백발이 보기 좋아요.


아름다운 말을 잊을까 봐서, 돌아나와 얼른 메모장에 받아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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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18

1월18일 페이스북 메모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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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비행기로 도착해서 택시 타고 집에 도착했다. 아내는 아직 밤 운전이 서투니까. 아내가 잘 교육시켜서, 문 열자마자 마루는 달려와서 안겼다. 새로 사 온 작은 자동차를 꺼내서 잠시 점수를 땄다. 와인레드 색깔이 매력적인 12cm 맥퀸 자동차다. 마루는 이게 뭐가 좋은 건지 모른다. 타오바오를 다 뒤져도 이 사이즈에 이 색깔은 하나 밖에 없었는데. 너는 아직 안목이 없다! 마루는 방으로 가서 갖고 있던 장난감들에게 새 장난감을 인사시켰다. 식구가 늘었다.


아이가 잠들고, 아내와 도란도란. 지난 열흘 넘는 시간 동안 출장 이야기도 하고, 만났던 사람들, 새로 한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없는 동안 바람이 빠져버린 자동차를 수리해야 하고 집 짓는데 필요한 사전 작업을 해야 하고 인허가 문제도 챙겨야 한다.


집 오니까 참 좋다.

다시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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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14


1월 14일. 페이스북 메모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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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한 가지 통로만 가지는 것이 더 멋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사람 말고, 자신이 지닌 단 하나의 수단으로 밖에 전할 수 없는, 그래서 그 하나의 수단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작가가 더 멋있다.


그 하나의 수단을 빼면 불구에 가까워서 차라리 안스럽다. 안스러워서 아름답고 멋있다. 여러 예술 장르를 넘나드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작가상은 아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그들은 엔터테이너에 가깝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작은 창문만 가진 사람. 그 작은 창문으로 어떻게든 바깥을 보고 바깥에 소리치려는 작가의 절박함은 진심일 거다. 그런 작품을 듣고 보는 마음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전인권의 노래 부르는 모습이 점점 힘겹다. 말도 점점 더 어눌해 진다. 그 어눌한 몇 마디 말을 마치고 노래를 시작할 때, 절박하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그에게 깃든다. 아, 예술가여.


어르신, 오래 건강하시라. 부디.


오랜만에 간 난징은 마침 날씨가 좋았다. 클라이언트는 준비가 덜 됐고, 나는 장비만 남겨두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다음주에 다시 가서 찍기로 했다. 기차 타고 오가는 시간이 휴식같아서, 추가촬영 요구를 가볍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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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08



낯선 것을 보여주는 사진은 시선을 끈다. 오지의 풍경, 이국의 사람, 갈 수 없는 곳을 찍은 사진은 그 내용으로 충분히 신선하다. 보는 재미가 있다.

낯설게 보여주는 사진도 시선을 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익숙하다고 믿었던 일상의 풍경이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생소한 대상으로 바뀌어 있을 때, 낯선 인상으로 드러날 때, 관람자의 당연함은 흔들리고 즐거운 충격을 받는다.

사진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낯설게 보여주기’를 시도한다. 카메라와 렌즈의 다양한 효과를 활용하거나 인상적인 빛을 발견하거나 때로 만들고 어울릴 수 없는 것을 한 화면에 조합하거나 시선이 포착할 수 없거나 포착하지 않는 순간을 노리기도 한다. 어떻게든 인식에 대한 기존의 공식을 깨려고 애쓴다.

사진가는, 당신의 확고한 질서에 균열 하나 내겠다고 악을 쓰는 악동이다.

뭐, 사진가 뿐이겠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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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은 M/D Reply

    오빠의 글은 여전히 단정하고 단단하다.
    어쩌면 빠르게 지나간 세월 탓에 내가 이제야 더 그렇게 느끼지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태공 자리가 오빠 자린데, 벼룩시장에서 물건팔고 있다는 오빠 글을 보고는 웃어버렸다.
    어쩜. 이리 '치옥'스러울까.

    건강하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글이 내 마음을 조금은 단정하고 건강하게 해준다.

    그래서, 오랜만에 이렇게 글을 남긴다.

    치옥 오빠, 여전하게, 아니, 더 멋지게 지내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2. 반작 M/D Reply

    한참 전에 썼구나. 이제 읽는다. 여전하니?

-Weather

170107

주말이어서 아침 지하철역이 널널하다. 텅 빈 통로를 지나는데 여자 한 명이 내 앞을 가로질러 간다. 의식하지 못 했다가, 향기가 나서 알았다. 꽃향이다. 주말 아침부터 단장하고 저 사람은 어디로 가나.

외모와 장식에서부터 화려한 사람보다는 수수한 듯 차린 사람이 뿌린 향을 맡을 때 더 행복하다. 의외의 인상이 좋아서다. 수수함 속에 번져나오는 향은 하나의 점으로 상대에게 닿는다. 화려한 사람의 향수는 그 화려한 장식 가운데서 살기 위해 치고 박는 것 같아서 처절해 보인다. 덜 예쁘다. 파트라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읽으면서 냄새의 절대적인 영향력과 파괴적인 힘을 처음 의식했었다. 지나치면 좋을 게 없다는 말은 여기에도 통한다.

좋은 향을 뿌리고 길 가는 여자는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다. 갑자기 맡는 향기는 건조한 걸음을 순식간에 화려한 산책길로 바꾼다. 향기는 지난 기억들 중에 좋은 것들만 끄집어 낸다. 잠시동안 나는 행복하고, 참 고마워서 속으로 인사한다. 고맙다, 여인아.




20년 좀 안 된, 중국에 처음 도착했던 날의 향기를 기억한다. 상하이 홍차오 공항 바깥, 버스 주차장이었지 아마. 사실 그 향은 잊었다. 다만 그 향을 맡았던 때의 인상만 남아 있다. 뿌린 지 한참 된 향수처럼 흐릿하기는 해도.
불쾌하지 않았다. 제법 낯설고, 신선했다. 아, 중국은 이런 냄새가 나는 곳이구나 싶었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 중국에 돌아오면 여권에 입국도장 찍듯 그 향을 찾았다. 반가움과 안도가 섞인 냄새였다. 한국이 편하지 않고, 어서 빨리 다시 도망치고 싶었던 때. 누구에게나 언제쯤은 있었을 것 같은 그런 때가, 내게는 그때였다.

나는 겨울에 따뜻하고 화려한 향을, 여름에는 시원하고 직선적인 향을 뿌렸다. 막 뿌린 향보다, 뿌리고 하루쯤 지난 외투를 다시 걸칠 때 맡는 은은한 향이 더 좋았다.

몇 년 된 클라이언트, 오사다이oshadai를 만날 때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브랜드 성격이 과장하지 않고, 덧대지 않는 것이었다. 오사다이를 운영하는 다이디戴娣는 브랜드와 닮아서 화장도 거의 안 했다. 그런 자리니까, 내가 향수를 뿌리면 너무 튈 것 같아서 오사다이 미팅에 갈 때면 향 없이 갔다. 그때쯤 문득, 향수의 향이 내게 없는 것을 내게 덧대려는 것 같아서 향수를 안 써야겠다 결심했다. 좋은 향은 여전히 좋지만, 아내의 선크림 냄새가 나는 참 좋지만, 내가 쓸 향수는 더 사지 않는다. 겨울에 어쩔 수 없이 바르는 로션은 향이 없는 것으로 따로 구해 쓴다. 몇 년 됐다.

그런데 요 몇 년 여름 땀냄새는 왜 이리 심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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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06

어제 비행기로 상하이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조금 짧아서, 열흘만에 들어와서 보름 안 되게 머문다. 이 도시는 또 비온다. 여기 없었던 지난 열흘 동안 계속 내리고 있었던 것처럼. 당연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비 온다.

한결같이 비 오고, 골목길이며 낡은 집이며 허물고 짓는 장면도 한결같아서 끊이지 않는다. 어느 날 보면 익숙했던 건물 하나가 반쯤 허물어져 있고, 다음에 보면 그 자리에 번듯한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 순식간이다. ​

손짓 한 번에 가면을 바꾸는 변검만큼 빠르다.

낯선 곳에 온 여행자는 낡은 골목을 걸으면서 생소한 음식을 맛보고 이방인을 만나고 서툰 잠을 자면서 여행지의 인상을 몸에 새긴다. 몇 장의 사진도 찍는다. 여행자가 낯선 곳을 기념하는 방식은 대게 비슷하다.

도시도 나름의 방식으로 그 자신의 예전을 기념한다. 철거하던 중에 잊어버리고 남겨둔 작은 돌기둥으로, 용케 살아남아서 도로를 조금 먹고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로, 내부를 고쳤더라도 외관만은 100년도 더 된 모습인 주택으로, 사라지는 것만 긁어 모아둔 박물관으로.

여전히 익숙한 상하이지만, 집을 제주로 옮겼으니 이제 이 도시에 오는 것은 형식상 출장이다. 신분이 바뀌니 인상도 변한다. 나는 이 도시를 어떻게 기념해야 되는지 고민이다. 이렇게 몇 해가 더 지나고, 내가 이 도시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씩 짧아질 때가 올 텐데.

나는 어떤 길, 어떤 음식, 어떤 사람, 또 어떤 장소와 냄새로 이 도시를 기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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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반작 M/D Reply

    흑백으로만 만들자. 그게 내가 기념하는 방식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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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을 자주 바꿨다는 건














명함을 새로 만들었다. 크기가 손바닥보다 크고, 세 번 접는다. 접은 것을 다 펴면 길이는 A4 종이의 긴 변 만하다. 명함 안에는 사진을 인쇄했다. 내가 찍은 포트레이트 사진 몇 장, 패션 사진 몇 장을 실어서 내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고 알려줄 수 있도록 했다. 또 QR 코드도 넣어서 명함에 실리지 않은 다른 사진들도 볼 수 있도록 했다. 나는 내 사진을 파는 데 서투니까, 명함이라도 이렇게 만들면 말 몇 마디 대신 한 번이라도 사진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결정했다. 우선 100장만 만들어서 다 쓰고, 아쉬운 부분을 수정하고 새로운 사진들로 바꿔가며 계속 만들 작정이다.








기억하는, 제대로 만든 첫 명함은 상하이에 와서 사진을 직업으로 삼으면서 만들었던 것이다. 짙은 회색의 얇은 코팅지를 썼고, 말라 죽어서 땅바닥의 갈라짐을 몸 위에 새겨놓은 숭어 한 마리의 사진이 있었다. 뒷면에는 for gogh 로고를 넣었다. 그러니까, 15년쯤 전이다. 이 명함을 얼마나 오래 썼는 지는 모르겠다. 받아든 사람들은 나름 특이하다며 반겨주었다. 물고기 명함은 우연찮게도 수주허苏州河 강변 작업실에 사는 동안 썼다. 스티로폼 바닥에 깔고 담요 덥고 잠을 잤던 그곳에서는 커다란 창문을 열면 바로 앞으로 누런 강이 흘렀는데, 나는 명함에 있는 물고기를 수 백 배쯤 확대한 거대한 물고기가 저 누런 강물 아래로 헤엄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꽤 자주 진지하게 했다. 내 물고기 사진을 아주 크게 인쇄해서 작업실 바깥 벽에 걸면, 아주 멀리서도 이 물고기를 볼 수 있겠구나 생각도 했다. 돈이 없어서, 못 했다.



끈적끈적한 탁한 붉은색을 좋아하게 되면서 명함에도 꼭 한 글자 정도는 와인레드 컬러를 썼다. 강변 작업실을 말아먹고 사는 동안, 잠시 여행잡지를 만들겠다고 한국과 중국을 오가던 동안 명함은 점점 단순해졌지만 핏빛같은 붉은 색을 꼭 조금씩 남겨 두었다. 명함은, 자주 바꿨다. 주소가 바뀌기도 했고, 직업이 바뀌기도 했다. 최근에는 작년에 잠시 열올리다가 관둔 직업 글쟁이 명함도 있다. 그 명함 받아들던 날, ‘이번 명함은 참 오래 쓸 것 같아요.’했던 말이 무색하게 일은 6개월 만에 끝났다. 서랍에 남은, 다 못 쓴 명함들은 불편한 마음으로 하나씩 찢어 버렸다. 회사생활이 아닌 내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명함을 자주 바꿨다는 건 아마도 방황했다는 뜻일 거다.




건축전시회에 갔다가 재밌는 명함을 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명함과 다를 게 없는데 두께가 상당했다. 명함 안에는 A3 사이즈의 종이가 아주 여러 번 접혀 있었다. 일반 명함 용지 두 장을 앞뒤로 삼아서 기본적인 명함 정보를 담고, 사이에 들어가는 종이를 모두 펴면 건축사무소의 포트폴리오 이미지들이 펼쳐지는 형태였다. 오, 인상적이다! 이런 식이면 나도 내 포트폴리오 명함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곰곰히 따져보고 관뒀다. 우선 접힌 면이 완벽하고 앞뒤 명함 종이의 네 귀가 딱 맞아들어가는 이런 완성도를 쉽게 구현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 사진 한 장이 너무 많이 접히면 보기 안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몇 번 수정한 끝에 지금 형태의 명함으로 결정했다.




명함에 내가 글쓰는 사람인 걸 꼭 넣으라는 말은 아내의 생각이었다. 낯뜨겁게 쓰기는 뭣해서, 인터뷰어.라고 썼다. 그리고 텍스트를 조밀하게 배치해서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했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붉은 색을 조금 넣었다.










새로 만든 명함은 일반적인 명함 사이즈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정도 규격화된 것도 아니다. 크기가 커서 휴대하기 불편하고 또 구겨지기 쉽다. 몇 곳 샵에서 명함 케이스로 쓸 만한 다른 통이 있을까 찾아봤지만 모두 크거나 작았다. 마침 인조가죽으로 만든 휴대폰 파우치가 디자인도 심플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하지만 이 명함이 기존에 있는 어느 휴대폰 사이즈와 비슷한 지 알 길이 없었다. 급한 대로 종이봉투에 넣어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가죽공예를 하는 병수와 수정 부부가 놀러왔다. 작년 연말 파티에 왔을 때, 이왕 가죽공예를 할 거면 한국에 잠시 가서 배우고 오는 것도 좋겠다는 조언을 했었는데 그 사이 결심을 했고, 한국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명함첩 이야기를 했더니 고맙게도 선물을 해주겠단다. 수정 씨는 크기도 작고 별 것도 없을 것 같은 명함첩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부탁한 사람이 미안할 만큼 많은 고민을 했다. 가죽의 선택에서부터 디자인, 그리고 마감과 실의 선택까지.













그래서 받은 명함첩이다. 명함 15장 정도를 넣을 수 있으면 좋겠고, 구겨지지 않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수정 씨는 이렇게 소화했다. 작은 나무토막을 덧대서 틀을 잡고, 두툼한 가죽으로 마무리했다. 맞춤 옷처럼, 명함에 딱 맞다. 기존에 가지고 다니는 수첩과 휴대폰 케이스와 같이 있으면 한 쌍처럼 어울린다. 텅 빈 면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명함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손때가 타면 글씨는 조금씩 흐려지고 지워지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새 명함이 나왔으니, 명함 잘 돌리고 사진도 더 많이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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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야지. 만나야지.


밤이 늦었는데, 마루가 운다. 요 며칠 기침감기를 앓는 중인데 잠 드는 것을 보고 내려왔는데 기침을 하다가 깨서 우는 모양이다. 아내가 달래고 있겠구나.


컴퓨터 작업만 하는 작업실로 쓰는 이 지하실을 아주 작은 스튜디오로 바꾼다. 있는 짐들을 다른 방으로 옮기고 여기는 상반신 포트레이트 정도를 찍을 수 있도록 고칠 생각이다. 큰 촬영이야 스튜디오를 빌리면 된다지만 이도 저도 아닌 작은 촬영은 어떻게 하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작으나마 공간이 있는 게 좋겠다.


개인 작업에 쓸 배경지를 만들었다. 조명도 됐고, 누구를 찍을 지도 생각했다. 이제 들고나가서 찍기만 하면 되는데. 되는데.


소설 토지.를 다시 읽고 있다. 몇 달 전에 마침 20권 짜리 전집이 중고로 나와서 냉큼 업어왔다. 아내는 10권을 읽는 중이고 나는 6권을 읽는 중이다. 대학교 언제였던가. 몇 학년 어느 계절에 읽었는지 기억 안 나는데, 여덟 달에 걸쳐 읽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그 전율도 희미하게나마 기억난다. 글을 쓰겠다고 작정하는 입장에서 읽으니 이 소설은 더욱 놀랍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사람의 생각 속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을 이토록 생생하게 일으켜 세우나. 게다가 그 사이에 얽히는 이야기와 펼쳐진 배경이란. 토지는, 보물이다.


지난 주에 공원에 갔다가 주차 딱지를 끊었다. 벌금 내는 곳은 멀었다. 갔더니 무인단속에 걸린 것도 있어서 4건, 15만원 가까운 돈을 내고 왔다. 오는 길에 마침 옛날 노래가 나왔는데 갑자기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너무 보고싶어져서 눈물이 났다. 훌쩍거리면서 친구 이름 하나하나 혼자 불러보면서 왔다. 봐야지. 만나야지.


나는, 다시 써야겠다. 문장을 생각하고 적는 시간이 참 좋다. 사진은 아무래도 눈앞에 보이는 걸 뭐든 찍어야 될 모양이다. 밥값을 벌어야 하고, 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문장이라도 든든하게 붙잡고 있으면, 마음이라도 버티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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