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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끝을 보고 온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연말에 따져보니 2020년에는 책을 읽지 않았더라. 단 한 권도 안 읽었더라. 그래서 부랴부랴 올해는 책을 손이 들고 있기로 마음 먹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다. 오늘 마친 책은 시간에 대해 쓴 물리학자의 책이다. 별로 재밌지 않아서 제목은 안 적어야지. 작고 얇아서, 들고 다니면서 아무 때나 읽기 좋을 것 같아서 골랐다. 책 속에는 구입 영수증이 그대로 끼워져 있었는데 2019년 부산에서 산 책이고, 책갈피 끈이 책 중간쯤까지 가 있는 걸 보니 읽다가 말았던 모양이다. 시간을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했는데, 그러니까, 몇 개만 적어보면,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시간은 연속하지 않는다.

시간이 사라져도 사건이 남는다.

우리의 시간은 엔트로피의 증가 과정이다.

등등.

 

책의 저자는 훌륭한 물리학자라는데 훌륭한 해설자는 아닌 것 같다. 일반인이 교양서 개념으로 읽기에는 어려웠다. 단어는 알겠는데 문장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 많이 건너뛰며 읽고, 그럴듯한 문장만 골라 읽으며 이해되는 문장들만 연결해서 전체 이야기를 파악하려니 더 어려웠다. 반쯤 내려놓고, 대충 읽었다.

 

시간의 절대성이 허구일 수 있다는 말은 흥미로웠다. 영화 '컨텍트'에서 외계인들이 그들의 언어 속에서 시간은 일방적이지 않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책의 후반부로 가면 어설픈 철학자의 주장 같아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얼마 전에 읽은 책 평행우주.의 후반부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전개됐는데, 양자역학의 등장 이후 존재는 불확정.되고, 그 뿌연 가능성을 고정된 상태로 포착하는 것은 관찰자의 개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철학자와 시인들이 한참 전에 이야기한 '내가 너를 불렀을 때 꽃이 된' 이야기를 물리학자들이 하고 있는 사태인가 싶다. 숫자의 깔끔한 조합으로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마침표를 찍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물리학이 시를 쓰고 철학하려는 것인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 결론을 읽으려고 천문학 물리학 책을 찾아들지는 않았는데.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처럼, 읽는 동안 시간 참 안 갔다. 

 

우리 우주를 관통하는 공통의 언어는 수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양자물리학이 관찰자의 개입이 확률의 모호함을 끝장낼 수 있다는 말을 읽고 나니까, 어쩌면 수학이 공통의 언어일 수는 있어도 유일한 언어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길을 통해 지금 최신 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형태를 꽤나 닮은 모습으로 그려낸 선배들이 있었다. 떠오르는 사람은 석가모니. 아인슈타인의 일화 중에, 그의 사후 최신 연구실에 초대된 미망인 이야기가 있다. 미망인에게 최신 연구장비를 소개하며 이 장비가 얻어낸 놀라운 실험결과를 말하자, 미망인은 '내 남편은 냅킨 뒷면에 대충 적어가며 그 결과를 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슷한 결과를 석가모니는 나무 아래 6년 동안 앉아서 생각만으로 얻어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그의 언어로 이미 우주의 끝을 보고 온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아내가 요며칠 '책 읽어주는 앱'을 테스트 중이다. 들어봐서 괜찮으면 마루에게 들려주려는 모양이다. 여러 미디어의 시대에, 책 읽기가 여전히 사람을 성장시키는 강력한 방법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읽어나가는 행위가 능동적이기 때문일까 싶다. 졸린 눈을 비비며 계속 읽고, 모르면 다시 읽고, 멈추어 생각하는 것은 적극적인 행동이니까. 여타의 미디어가 가만히 있어도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에 반해 독서는 직접 읽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메모처럼 휘갈겨 두고, 그만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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