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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가신 게 10년 전 일이란다. 그때 중국 매체도 여러 이야기를 다뤘다. 몇 달이나 지났을까, 길 가다가 중국잡지 낡은 포스터가 막 떨어져 나갈 참이었다. 가판대 주인에게 부탁해서 포스터를 얻었다. 몇 번의 이사와 귀국까지 갖고 왔다.

 

노무현, 스스로 사형을 선고하다.

 

잡지는 그렇게 적었다. 

 

드물지 않게 노무현을 떠올린다. 잘 되어가는 정치와 사회를 보면 고마워서 생각나고, 나쁜 정치와 속임수의 행태를 보면 너희 때문에 대통령이 가셨다 싶어서 또 생각난다.

 

무슨 말을 보탤까. 같은 시대를 살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덕분에, 지금 바르고 강한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세상이 좋아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참 많이 고마워해요. 

 

우리 대통령. 시대를 옮긴 거인. 다시 못 만날 사람. 

 

그 빚을 마음 속에 지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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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쓴다

퇴역 선장의 회고





사진관에서 준비했던 5월 가족의 달 이벤트, 그 첫 번째 촬영이 있었다. 두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부축하고 사진관으로 들어온다. 한 장의 사진보다 한 때의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돌아볼 수 있도록, 사진관은 질문이 많다. 빛 좋은 곳에 앉아서 아버님께 묻는다.

아버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내가 33년 생이예요. 그런데 호적에는 36년 1월 25일로 올렸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내가 나이가 들어서 말이 시원찮아요. 옛날엔 안 그랬는데 이제 그렇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버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시고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하신다고 한다. 당신도 그런 자신을 아신다는 듯, 이야기에 앞서 양해를 구하신다. 문장의 끝까지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에서 의식을 붙잡는 그의 노력이 드러난다. 두 아들과 딸은 한편으로 아버지를 부축하고 한편으로 아버지의 말에 살을 보탠다. 큰아들에게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아버지는 해외에서 배를 타셨어요. 그래서 1년에 한 번쯤 집에 오시고는 하셨죠. 아무래도 아들의 애정과 딸의 애정은 느낌이 좀 다르죠. 저도 어렸을 땐 집 밖으로 돌아다니기 바빴으니까요. 어렸을 때 방학 때면 아버지 배 타고 연안을 따라다녔던 기억은 나요. 너도 있었지 않냐?


이야기는 딸에게 넘어간다.


나도 방학 때 아빠 배 탔던 기억은 나요. 한 번은 바다 가운데였는데 아빠가 나를 바다에 빠트린 적이 있었어요. 나는 수영을 못 했는데, 그때 아빠랑 기관장 아저씨랑 선원분들이 함께 막 웃으셨어요. 그러니까 나는 물에 빠지긴 했지만 ‘이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 나는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무섭진 않았다는 기억이 있어요.


막내는 조금 다르다. 해외를 다니시던 아버지는 막내가 대학생일 무렵부터 한반도의 물길을 주로 다니셨다. 그래서 어릴 때 기억 중 대부분은 엄마가 차지한다. 다만 막내니까, 용돈을 참 많이 주셨던 아버지의 기억은 선명하다.


아버지는 글쓰기를 즐기셔서 끊임없이 편지를 적어 보내셨다. 당신의 아내에게는 연애편지 같은 애정의 편지를 계속 썼고, 한참 자라는 딸 단속도 이틀에 한 번 꼴로 보내는 편지로 대신했다. 딸은 쓸 말도 없는데 매번 써야 하는 답장이 늘 힘겨워서 편지 받는 일이 버거웠다고 한다. 땅에 발 디디고 사는 딸은 더 적을 말이 없는데, 반복되는 수평선만 보았을 아버지는 무슨 하실 말씀이 날마다 새롭고 끝없었을까? 아버지는 세상의 바다를 떠도는 선장 생활을 마치며 그동안 받았던 편지를 모두 갖고 오셨다. 그리고는 그동안 당신이 쓰셨던 편지를 따로 모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참 서운해하셨다고 한다. 딸의 말이다.


세 남매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아버지는 조는 듯 고개를 숙이고 햇볕 아래 가만 앉아 있다. 2015년에 아내가 죽은 후 그는 조금씩 기력을 잃었다. 몸의 기력은 마음의 기력이기도 했던 것일까. 그는 치매 초기를 앓고 있다. 최근의 일부터, 먼 사람부터 하나씩 잊어간다. 그래서 아버지의 기억 중에 생생한 것은 지난 바다 위의 풍경이고, 세 자녀의 이름이다.


의자에 아버지를 앉히고 조명과 카메라를 맞추고, 리모컨을 넘겼다. 매일 보아서 더 이상 낯설게 없다 싶은 얼굴도 카메라 뷰파인더 안에 들어가면 새삼스러운 얼굴이 된다. 부모님을 조금 다른 거리에서 바라보기. 이번 이벤트에서 의도한 것이다. 아버지의 포즈를 고치며 세 자녀가 돌아가며 리모컨을 잡는다. 카메라는 넘겼으니 나는 계속 묻는다.


아버님,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다른 일을 해 볼 수 있다면 어떤 걸 하시겠어요?
모자 쓰는 일.
아니, 아빠. 어떤 직업을 갖고 싶냐고? 


아빠가 질문을 잘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딸이 말을 고쳐 물었다. 그는 손을 들어 쓰고 있는 모자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이 모자 쓸 거야.



세상을 항해하는 선장의 모자. 아버지의 뜻은 확고했다. 다시 젊어지고 다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면 다시 이 모자를 쓰고 바다로 나갈 거다. 그는 도대체 바다의 무엇이, 바다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그럼 다시 배를 타시면 어디를 가 보고 싶으세요?
여기저기. 안 가 본 데 다 가고 싶어. 너하고 안 가 본 데.


 영국 여자에게 모자도 선물 받고 소련 여자에게 손톱깎기도 선물 받으며 잘 나가던 선장은 이제는 고개도 들기 힘든 기력으로, 여전히 바다가 좋다고, 시원해서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 딸과 함께 못 가 본 온갖 곳을 가고 싶다.



여전히 아들, 딸이지만 이제 큰아들 나이도 환갑이다. 맞잡은 네 명의 손은 다 같이 주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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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 추락하다

드론, 추락하다


서귀포 사진이 필요하게 생겼다. 새벽부터 장비를 챙겨 한라산을 넘어 왔다. 타고. 솔오름 전망대 도착 시간은 아직 해도 뜨기 전이다. 뜨기를 기다려 다시 봐도, 빛이 아니네. 아침 빛에 여긴 없구나. 차를 몰아 정방폭포 주차장으로 간다. 여기서는 서귀포항과 섶섬, 문섬까지 찍을 있다. 오늘은 카메라보다 드론이다. , 준비하시고, 날리세요.


아차, 메모리가 없다.

년에 번씩 벌어지는 실수다. 매번 신경쓴다고 해도 방심하는 때가 있다. 그게 대충 주기다. 캐시메모리에 저장한다고 해도 답이 나온다. 밝기를 기다려 아무 거나 작은 용량으로 하나 사서 끼울까? 아차, 드론 베터리 충전기도 가져왔다. 베터리 중에 하나는 새벽에 이미 썼고, 남은 하나라고 봐야 고작 30분쯤 날리면 방전될 텐데. 된다. 결국 다시 산을 넘어 왕복 시간을 다녀오기로 한다.


집에 도착하니 아직 아침 시간이다. 아들은 일어나서 내복 차림으로 밥을 먹고, 아내는 벌써 새벽 텃밭 일을 한참 마쳤다. 새벽에 베터리를 충전기에 걸고, 메모리를 챙긴다. 전기자동차 베터리도 잠시지만 충전기에 걸어둔다.


심기일전. 다시 산을 넘어 도착한 고근산. 정상 바로 아래까지 도로라더니. 나는 발짝이면 알았다. 아니네. 나는 구두를 신고 왔을까.


어쨌든 정상. 고근산은 가운데가 움푹 파인, 전형적인 제주 오름의 형태. 산이라고 이름 붙어 있지만. 드론을 날린다. 한라산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니까, 드론은 북동쪽으로 뜬다. 빛이 예쁘지 않다. 엇갈린 방향. 오늘 아침에 찍었어야 한다. 어쨌든 아쉬운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 잠시 곳을 봤던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던가. 갑자기 모니터에 뜨는 마이너스 고도 알림. , 산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고 얼른 고도를 올리려는데, 덜컹. 화면이 흔들린다. 그리고 이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나뭇가지. , 추락이다. 


다시 떠라. 제발 떠라 드론.


화면은 고정됐고, 움직이지 않는다. 추락이다. 다행인 것은 흔들리는 화면이 오래 가지 않았으니 아마도 나뭇가지에 걸려서 바닥까지 떨어지지는 않은 듯하다.


대충 드론이 날아오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이는 것은 없다. 기척도 없다. 얼른 벗어 놓은 카메라를 메고 드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숲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내가 있는 곳은 작은 분화구의 남서쪽이고 드론은 분화구를 가로질러 동쪽 어디쯤에서 떨어진 같았다. 돌아오는 중에 부딪쳤으니 아마도 산사면의 오르막 어디에 있을 것이다. 화면에는 아직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 한손에 조종기를 들고 곧장 분화구를 가로질러 뛴다. 길은 없었다. 덤불과 가시가 몸에 엉켰다. 


다행히 멀지 않았다. 화면을 보며 방향을 수정하며 5분쯤 걸었다. 작은 등산로 근처였다. , 화면에 뜬다. 드론은 지금 머리 위에 있다.


급하게 하지 말자 혼자 다독이며 우선 근처에 짐을 내렸다. 외투를 벗고, 장갑을 꼈다. 그리고 반경 10미터를 뒤진다고 생각하고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 꼭대기 어디 걸렸을 거야. 보일 거야. 덩치가 초록의 숲에 있으니까 바로 보일 거야.


크게 바퀴를 돌았지만 울창한 어디에도 드론은 없다. 

, 없다.

굵은 나무 그루를 타고 중간까지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없다. 없다.


이건 사막에서 모래 찾기다. 계속 붙들고 있다는 무모하다. 머리가 자꾸 설득한다.


, 상황을 수습해야지.

촬영은 마감이 급하니까,

우선 어떻게든 드론을 빌려서 내일 마저 찍자.

드론은 필요하니까 드론은 할부로 주문해야 하나. 나올 구석이 없는데.

기종으로 바꿔야 하나? 그러면 지금 있는 조정기와 여분 베터리가 데가 없는데.

어쨌든 찍어야 된다. 모레쯤 마감시킨다고 보면 내일 하루는 있다. 오늘 얼른 돌아가서 드론을 빌리러 보자. 빌려주면?


온갖 생각이 정신 없다.


다시 숲길로 나와 이리 저리 둘러본다. 조종기 화면에는 이미기체연결 끊김메시지. 이제 어떡하나.


우왕좌왕하는데, .

작은 바람이 분다. .


, .

뭐지? .


멈춰서 가만 들어보자. 작지만 분명히 난다. 소리, 드론 모터 돌아가는 소리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드론은 없다. 들었나. 근처에 고장난 안테나라도 있나. 이어폰에서 신호간섭이라도 있나. .


혹시나 싶어 이리 저리 돌아보는데 자리. 분명히 여기 자리에서만 소리가 난다. 아무리 봐도 아무 것도 보이지만, 분명히 자리에서 소리가 난다. 정확하게 드론이 있다고 지도에 표시된 자리다.


! 있다. 저기 있다. 저기 위에 빨간 불빛 있다. 드론 꼬리 불빛. 옆에 나뭇가지랑 다른 모양도 조금 보인다. , 솔잎 뭉치 안에 저기! 지도는 정확했다. 반경 10미터를 뒤진다는 각오를 비웃듯이, 드론은 1미터 오차 없이 자리에 있었다. 내가 몰랐을 .


소리가 아니었다면 절대 없는 모양으로, 높은 곳에 드론이 매달려 있다. 됐다. 보았으니 됐다.


이제 꺼내러 가자. 이럴 쓰려고 10 넘게 클라이밍을 배웠다. 신발끈 묶고, 둥치에 가지를 이리 저리 잡아가며, 혹시 부러질 모르니까 체중을 나눠 실어야 한다. 나는 구두를 신고 왔을까. 나무는 높았다. 높으면 ? 드론이 저기 있는데. 드론은 다행이 날개 하나 부러진 없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잎과 엉켜서 걸려 있었다. 꺼내서, 무사히 땅으로 내려왔다.


긴장이 풀리고 다리가 떨렸다. 날아다니는 녀석이니까 언젠가 떨어질 밖에 없겠지만, 지금은 된다. 클라이언트는 마감을 재촉하고 있고, 다시 돈도 시간도 없다. 지금은 된다. 


운이 좋았다. 추락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드론이 무사히 돌아오기 위한 모든 조건이 좋았다. 추락지점이 멀지 않았고, 접근하기 어려운 바다나 절벽도 아니었다. 나무에 걸린 덕분에 망가지지도 않았고, 추락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위치가 표시되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추락위치를 파악하는 기능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높은 곳에 걸린 드론을 갖고 오는 다행히 내가 있는 일이었다.


새벽 메모리를 놓고 일부터 추락까지. 아내는 오늘 별로 좋다며 일찍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클라이언트의 독촉이 있다. 초록 풀즙을 뒤집어쓴 녀석을 갖고 내려와서 다시 시동을 건다. 날아라 드론, 밥값 벌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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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이미 떠버렸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구엄포구까지는 차를 타면 10분쯤 걸린다. 한라산을 대각선으로 넘어 남쪽바다까지는 보통 한 시간쯤 걸린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서 공천포구로 왔다. 제법 일찍 출발했는데 오는 동안 해는 수평선 너머로 떠올랐다. 계절이 바뀌면서 새벽이 빨리 온다. 딱히 일출을 찍어얄 것도 없었다지만 해는 벌써 떠버렸고, 오전 내내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면서 사진 한 장만 건지면 되니까 재촉할 것도 없다. 따뜻한 차 안에 앉아서 점점 높아지는 해 보면서 메모장을 연다.

계간지의 표지사진을 의뢰받았다. 이런 종류의 사진은 어렵다. 나는 상업사진가인데, 상업사진은 대부분의 경우 클라이언트와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분명하다. 찍어야하는 대상과 구사해야 하는 기술의 내용이 뚜렷하다. 그런데 이번 작업은 무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를 찍어서 클라이언트의 기대치를 넘는 동시에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붙잡아야 한다. 이쯤되면 주관식 문제 중에서도 특히 질문은 짧은데 답은 길게 써야될 것 같은 문제쯤 된다. 게다가 나는 풍경사진에 내세울 것도 없는데. 이 답 안 나오는 문제지를 받아들고 어디든 가서 뭐든 해봐야 하니까, 공천포 바다에 있다.

몇 번 그런 경험이 있다. 클라이언트와 에이전시, 스탭들까지 열댓 명이 스튜디오에 들어차서 모두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는데 좀처럼 사진은 안 나올 때, 문 닫힌 스튜디오에는 도망칠 구멍도 없다. 그럴 때는 괜히 조명을 이리저리 옮겨보면서 혼자 속으로 고함을 친다.

괜찮다. 시간은 어쨌든 간다. 어떻게든 끝은 난다.

그런 생각으로 버티고는 했다. 그런 때에 비한다면야 이 정도 부담감은 껌이다. 옆에서 미심쩍은 눈빛으로 지켜보는 클라이언트가 있길 하나 당장 두 시간 후에 마감이길 하나. 아직 시간도 있고, 발품만큼 사진이 나올 거라는 믿음도 있다. 그리고 나는 주말 이 아침에 벌써 산 너머 바다에 와 있지 않나. 어제 새벽은 중문으로 가서 찍었고 오늘은 여기 남동쪽을 걷는다. 아직 며칠 여유가 있으니 몇 번은 더 와서 어딨는 지 모르는 한 장을 찾아다닐 작정이다. 일을 핑계 삼아 한가롭다. 문장이든 사진이든, 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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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을 자리가 저긴데

오후에 집 아래 구엄포구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에 다녀왔다. 본래 아내가 나가는데 오늘은 마침 3.1절이고, 마루는 어린이집을 안 가고, 그러면 아내가 플리마켓을 가는 동안 내가 마루를 살펴야 하고, 마루를 살피는 것보다는 플리마켓이 편할 것 같아서 대뜸 내가 가겠노라고 나섰다.

새로 만든 상품이 없으니까 이제는 상품성이 다해 가는 엽서와 책갈피 등을 챙겼다. 포구에 도착해서 자리를 배정받고, 테이블을 펼치고 가져온 것들을 정돈했다.

손님은 많았는데 우리 엽서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빛은 따가워서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얼굴이 다 탔다. 오랜만에 가져간 책을 펼쳐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물건이 안 팔리니까 책도 안 읽히고 시간도 안 갔다. 내가 앉은 뒤편으로 바다가 펼쳐 있고 그 너머에는 구엄방파제가 있다. 방파제 끝에는 언제나처럼 낚시하는 사람들이 몇몇 섰다. 뭐가 얼마나 잡히는 지는 몰라도, 저기 서 있는 게 어딘가. 내가 있을 자리가 저긴데. 여기가 아닌데. 오후 내내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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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가지런하기 어렵다.




  지난 겨울 동안 썼던 장작이 바닥을 드러냈다. 작업실 공간 전체를 데우려니 나무 한 짐 타는 게 금방이다. 마당에 널려있던 목재 팔레트 몇 개를 모아놓고 직쏘로 끊어낸 다음 기계톱으로 썰었다. 썰어 낸 장작이 한쪽에 무더기로 쌓였다. 


  장작이라면 마땅히 마당 한 켠이나 집 벽 바깥쪽에 가지런히 높게 쌓여야 한다. 온갖 이미지 속에서 내가 본 장작이 모두 그랬으니까. 그러나 막상 만들어 보니 어디 가서 돈 주고 사 오는 장작이 아닌 이상 좀처럼 가지런하기 어렵다. 우선 구해 오는 나무가 목재 팔레트부터 공사장 자투리 나무,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나무들까지 출신 성분이 다양하다. 생긴 것이 다르고 붙은 모양이 제각각이라 대충 난로 입구에 걸리지 않을 크기로 자르면 그만이다. 이리 저리 박힌 못은 하나하나 뽑는 것보다 태운 후에 못만 따로 걷어내는 것이 빠르다는 걸 알게 됐다. 각진 나무, 둥근 나무, 구부러진 나무, 못 박힌 나무들을 어떻게 쌓아봐도 차곡차곡이 안 된다. 어지러운 날들이 정신 없이 쌓인 한 달, 일 년이 꼭 저럴까 싶다.


  매일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과로 움직였다던,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의 산책 시간을 보며 시계를 맞췄다던 철학자를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터 였나 그럴 수도 있었겠다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같아서는 공감을 넘어 부럽기도 하다. 무언가 집중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끊어내야 비로소 가능한 삶의 형태같기 때문이다.


  산 속이나 신의 전당에 들어가 사는 수도자의 삶이 아닌 이상, 일상이 가지런하기는 어렵다. 잘 정돈된 삶은 돈 주고 사다쓰는 장작 같아서, 비슷해 보이는 삶도 들여다 보면 아무렇게나 쌓아 둔 장작더미 같을 거다. 한 사람의 일이, 하루의 사건이 키 맞춰 자른 나무토막처럼 열 맞춰 오지는 않는다.


  괜찮다. 조금 엉클어져도 삐딱거리면서 간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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