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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이 지나갔다.

새 사진수업을 시작한 것이 이제 일주일 됐다. 사진에 애정이 많은 분들이라 눈빛이 반짝거리고 옆에서 누가 툭 건드려주기만 해도 모아놓은 사진들이 온몸에서 툭툭 떨어져 내릴 것 같다. 덕분에 나도 조금 더 자극받고, 일방적인 수업이 아니라 함께 하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같이 달려보겠노라 다짐을 한다.

 

첫 번째 숙제로 나간 것은 빛. 다음 수업까지 우리는 매일 빛을 찍어 공유하기로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나는 거의 매일 사진관과 정원, 팬션 안에서 어슬렁거리며 어디 쓸만한 빛 없나 뒤적거린다. 동네 장날 반쯤 늘어진 옷과 곧 떨어질 것 같은 슬리퍼로 장터 외곽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처럼.

 

빛은 도처에 있는데 하루이틀 찍고 나면 인상적인 빛은 그 광채를 잃는다. 어느새 무난하고 익숙해져버린 빛. 아, 어떻게 하면 남은 일주일 동안 지루하지 않은, 갓 딴 초당옥수수 수염냄새 같은 빛을 건질 수 있을까. 고민은 얕고 카메라는 멀다. 카메라보다 공구 들어야 할 시간이지.

 

대출이 나왔다. 오래 걸려서 그 동안 미뤄둔 것이 많고 또 신세 진 곳이 많다. 

대출이 승인되었습니다. 이 한 줄 문자가 어찌나 반가운지. 마음이 턱 놓인다. 이보다 더한 빛이 최근 내 일상에 있었었나?

 

오후 네 시에 내 통장에 입금된 대출금은 불과 한 시간 사이에 사방으로 찢어져서 다시 쏘아져 나갔다. 

뭐지? 나에게 빛이 비춘 것 아니었나?

주변이 일순간 빛으로 눈멀었다가 다시 돌아온 느낌.

 

이번 빛은 섬광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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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분하지 않겠다.

통분하지 않겠다.

 

마루야. 너는 한참 분수를 배우는 중이다. 요즘 무렵에는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를 배우더구나. 왜 그 순서인가 했더니, 최소공배수 다음에는 그를 응용한 통분을 배우는 구나. 서로 다른 분자의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우선 분모를 같은 크기로 만든다. 듣고 보면 꽤 깔끔해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오늘 아빠는 운전 중에 불현듯 생각했다. 내 주변의 상황이 바뀌어서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들 중에 하나씩 둘씩 내려놓아야 한다면 무엇부터 그만 두게 될까. 그리고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일까. 그러다가 지금 아빠가 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가치를 따져보려고 시도하다가 멈췄다. 여러 가지의 가치를 따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기준이 필요할 텐데, 제일 먼저 떠오른 기준은 돈이었다. 내 한 시간은 얼마쯤의 돈일까? 내 취미는? 내 작업은? 그리고 내 산책은 또 얼마쯤일까? 돈이라는 분모로 통분해보려다가 깜짝 놀란다.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공통분모로 삼을 만한 다른 것들을 몇 개 떠올려보다가 관둔다. 마루야, 네게 자신있게 통분을 설명하던 아빠를 반성한다. 언제나 답이 있는 수학문제처럼 세상을 살라고 너에게 말하지 않아야겠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세상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으려고 애쓰고, 스스로 찾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분모로 주변 모든 분자의 크기를 줄세우게 될까 무섭다.

 

마루야. 세상에는 통분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공통분모는 없을 때가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틀렸다는 빗금을 긋지 말자.

통분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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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션 허가가 났다.

팬션 허가가 났다. 공사 1년만에 드디어. 지하철에 앉아서 내내 편션에 비치해둘 책자 내용을 다듬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팬션주인으로 사는 인생을 생각해본적 없다. 처음 사진을 각오하고 상하이에 갔을 때, 깨어있는 시간 동안은 온종일 사진만 생각했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현지 대학원에서 학위공부를 하는 한국유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때도 나는 단지 사진에 도움이 된다는 마음으로 함께 스터디했다. 나중에 아내는 왜 그때 학위를 안 땄냐고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제주에 와서 사진관을 연 뒤에도 언제나 사진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그러기를 8년,
이제 새로운 사업자등록증을 판다. 그동안은 타협의 시간이었을까. 현실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시간이었을까.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다. 결론지을 수 없는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이 순간을 패배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이왕 하는 거, 잘 되면 좋겠다. 그 ‘잘’에는 물론 경제적인 성과가 가장 기본조건이겠지만 그러나, 재미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게스트와 더불어 진심으로 잘 놀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놀이터를 준비하는 심정으로, 팬션에 새 이불을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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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지금처럼.

 

사주를 봤다. 촬영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오신 분 중에 명리공부를 하는 분이 계셨다. 사진관에서의 내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고, 사주를 좀 봐주겠다고 하셨다. 내가 태어난 시각은 도둑맞은 어머니의 수첩과 함께 사라졌으니까 생일만 말씀드렸다.

 

한참을 살펴보시고 이런저런 상황과 대조해가며 그 분은 내가 태어난 시각이 아침 7:50분에서 조금 뒤까지. 그 사이쯤일 거라고 추리해 주셨다. 여러 이야기들을 해주셨고 대충 언제쯤부터 대충 어떻게 될 거라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다음날 길을 걷다가 문득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때를 대비해서 뭘 어떻게 할까? 자문했다. 대답은 지금처럼.

아, 나는 그렇게 살고 있었구나. 어느새.

 

'다시 태어나도 이 생을 반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살아야 한다던 철학자의 말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도저히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좋네. 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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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스러운 사람이 되기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얼마 전부터 생각이 나서 페이지를 열어두고 적지 못 했던 메모를 이제야 적어둔다. 적고 정리할 것이 많은데 그것들은 좀 더 큰 시간 덩어리가 필요하니까, 아침 잠깐 틈에는 이것만.

 

나는 별로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진지함이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었는데.

 

일상의 유쾌함이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진다. 특히 AI시대에, 내가 원하는 정확한 답을 빠르게 내어놓는 것은 나보다 AI가 훨씬 더 잘 한다. 순식간에 완벽한 답을 내놓을 테니까. 그럴 수록 인간에게 더 필요하고 또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핵심 중에 하나는 유머가 아닐까 생각한다.

 

유머Humor와 휴먼Human은 닮았다. 마치 하나의 뿌리처럼. 찾아보니 어원은 다르다. humor는 몸안에 흐르는 체액을 뜻하는 라틴어 후모르humor에서 왔다고 하고, 인간을 총칭하는 human의 어원은 라틴어 humus이고 ‘흙’을 뜻한다고 한다. 흙과 채액이라... 거리가 제법 된다. 그럼 두 단어가 닮은 것은 단지 우연일까. 뭐, 세상에 우연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만.

 

좀 더 재미있는, 유머스러운 사람이 되기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말이 많으면 필연적으로 실수가 는다. 그래서 말 많은 나를 경계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는데도 밉지 않고, 상대를 상처입히거나 상황을 비꼬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유쾌하게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천부적 재능을 가진 것같다. 

 

좀 더 많이 말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유쾌한 웃음을 다 같이 웃을 수 있는 말하기를 틈틈이 연습하고 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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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Weather

작업이 걸린 풍경

새 전시 준비를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는 전시공간이었는데, 원하는 전시공간을 연결해줄 수 있는 방법을 탐색했고, 담화헌의 강승철 작가가 도와주어서 미팅할 수 있었다. 현장에 찾아가서 자료를 보여주며 미팅했고, 어제 해보자는 답을 받았다.

최종 전시까지는 또 여러 난관이 있겠지만, 하나씩 풀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작업이 걸린 풍경을 마주할 수 있을 거다. 그 장면을 벌써부터 상상한다.

나에게만 보이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으며 사진을 찍는다. 누군가는 해야할 이야기인데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 이걸 나라도 꼭 해야한다는 간절함으로 찍는다. 

염두에 두었던 공간의 기분 좋은 허락. 첫 단추는 좋다.

재밌을 거야. 이번 작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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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재밌어

좋아, 재밌어.
요즘 어때요? 라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온 대답.
여전히 되지 않은 것이 많고, 막힌 난관도 있지만 나는 요즘을 이렇게 보내고 있구나.

무엇이 얼만큼 좋은 것인지, 누구와 무엇을 하는 것이 재밌는 것인지 일일이 따져보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내뱉은 대답이 괜히 반갑다.

좋아,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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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둔탁하고 지끈거리는

왼쪽 머리에 작은 편두통이 며칠 째 가시질 않는다. 아마도 소화 문제인 듯해서 가볍게 먹고 있긴 한데 잘 낫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오늘은 괜찮나 하며 머리쪽에 신경을 집중해보면 여전히 둔탁하고 지끈거리는 왼쪽 머리가 있다.

오늘은 중학교 학생들 사진수업이 있다. 어떤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면 저 아이들에게 잘 와닿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할 수 있는 진심으로 아이들의 눈을 바라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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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Weather

오늘 저녁은 돈까슨가?

마루랑 습관 이야기를 시작할 때,

아빠는 매일 아침 운동과 두 줄 글쓰기를 하겠다고 했다.

 

오늘 아침 운동을 마치고 아침을 먹는 중,

마루야, 아빠가 오늘은 글을 아직 못 썼어. 오늘 중에 쓸 거야.

 

마루의 이어진 반응은,

오, 그럼 오늘 저녁은 돈까슨가?

 

습관에 이어졌던 약속. 못 지키면 그날은 네가 먹고 싶은 걸 사 줄게 했던 것.

아니, 아직 오늘이 다 가지 않았는데. 나는 아침 먹고 쓸 생각이었는데!

 

아내가 좋아하는 돈까스 집이 저녁 영업을 하지 않아서 저녁은 치킨으로 대체하기로.

덕분에 나는 치킨을 내어주고 오늘의 문장을 얻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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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박달씨의 이력

봄, 마당 한켠에 진한 초록잎으로 가득찬 나무는 박달씨다.

집을 짓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뒤편에 깔아둔 보도블럭 사이에서 나무줄기 하나가 솟았다.

저건 뭔가? 한 동안 두고 보았는데 제법 발목을 넘어 무릎 가까이까지 자라 올라간다.

기특한 식물들을 가만 못 보는 아내가 보도블럭을 치워내고 꺼냈다. 딱 블럭의 틈만큼 얇고 긴 뿌리를 내려자란 녀석.

어디서 날아온 나무 씨앗일까? 그 틈에서 그만큼 자란 것이 기특해서 마당 한쪽으로 옮겨두고 잊었다.

 

그런데 웬걸, 해 지날 수록 이 아이가 쑥쑥 큰다. 이름도 모를 것이 쭉쭉 자라서 수형도 번듯하다.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이 나무의 정체를 알아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아마 가을 끝무렵이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를 수피만 보고 나무도감에서 찾아보았으나 실패.

어서 다음해 봄이 오기를, 녀석의 잎이 돋아나고 이름을 알아낼 수 있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봄,

비슷한 것들 중에서 찾고 찾아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박달나무!

잎 모양부터 수피 형태까지 도감에서 알려주는 박달나무가 똑 너구나.

그때부터 나는 이 나무를 박달씨라고 부른다.

 

마당 반대쪽에 있는 유칼립투스와 함께 우리집 양대산맥이 된 박달씨.

작년 팬션공사 때문에 집 앞으로 잠깐 옮겨심었는데, 주방에서 바라보면 창 밖에 떡하니 박달씨가 보인다.

그 느낌이 참 좋아서, 그냥 이 자리에 붙박기로!

 

기다린 손님 오듯, 박달씨 가지에 연초록 잎이 오른다.

아, 봄이구나. 

 

어서와, 박달씨. 해도 마당에 신나고 멋진 일들이 많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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