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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도 쓸 데가 없어서.

나는 살면서 어떤 상황, 어떤 사람 앞에서 한 번도 충분한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단정할 수 없지만, 기억하기에는. 나는 항상 서툴고 부족한 사람이었고 조마조마하며 애쓰며 그 부족함을 겨우겨우 메우며 또는 감추거나 외면하며 이제껏 살았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지치지만, 지친다고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지치고 만다. 그럴 때는 유난스럽게 겨울나무가 부럽다. 이번 생은 베렸어.라고 문장 한 줄을 툭, 던져놓던 시인도 자꾸 생각난다. 버린 생을 한 해마다 깔끔하게 털어내고, 새로운 생을 살아볼 각오와 기대를 갖는 겨울 나무. 작업실과 사진관에, 창고와 집에 겹겹으로 쌓여서 몇 년째 한 번 열어보지도 않는 많은 것들. 저것들조차 털어내지 못 하면서.

 

출장에서 복귀한 후 밀린 일과 팬션 일로 날마다 마감을 쳐내고 있다. 덕분에 다녀온 후 브라질 기록은 한 줄도, 한 장도 열어보지 못 했다. 일 잘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일도 발 앞에 낙엽을 쓸듯 가볍게 해내던데, 나는 한 개 한 개가 깊은 뿌리를 내린 나무둥치를 걷어차는 것 같아서.

 

이런 내게 어울리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를 생각했다. 서너 평 남짓 작고 텅빈 공간. 그 정도가 내가 잘 관리하며 쓸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어디도 쓸 데가 없어서.

여기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가 닿을 수도 있다는 작은 기대가 있다.

뱉어낼 수 있는 생각 중에서 가장 바닥에 있는 생각들을 여기에는 적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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