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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 선장의 회고





사진관에서 준비했던 5월 가족의 달 이벤트, 그 첫 번째 촬영이 있었다. 두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부축하고 사진관으로 들어온다. 한 장의 사진보다 한 때의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돌아볼 수 있도록, 사진관은 질문이 많다. 빛 좋은 곳에 앉아서 아버님께 묻는다.

아버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내가 33년 생이예요. 그런데 호적에는 36년 1월 25일로 올렸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내가 나이가 들어서 말이 시원찮아요. 옛날엔 안 그랬는데 이제 그렇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버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시고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하신다고 한다. 당신도 그런 자신을 아신다는 듯, 이야기에 앞서 양해를 구하신다. 문장의 끝까지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에서 의식을 붙잡는 그의 노력이 드러난다. 두 아들과 딸은 한편으로 아버지를 부축하고 한편으로 아버지의 말에 살을 보탠다. 큰아들에게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아버지는 해외에서 배를 타셨어요. 그래서 1년에 한 번쯤 집에 오시고는 하셨죠. 아무래도 아들의 애정과 딸의 애정은 느낌이 좀 다르죠. 저도 어렸을 땐 집 밖으로 돌아다니기 바빴으니까요. 어렸을 때 방학 때면 아버지 배 타고 연안을 따라다녔던 기억은 나요. 너도 있었지 않냐?


이야기는 딸에게 넘어간다.


나도 방학 때 아빠 배 탔던 기억은 나요. 한 번은 바다 가운데였는데 아빠가 나를 바다에 빠트린 적이 있었어요. 나는 수영을 못 했는데, 그때 아빠랑 기관장 아저씨랑 선원분들이 함께 막 웃으셨어요. 그러니까 나는 물에 빠지긴 했지만 ‘이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 나는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무섭진 않았다는 기억이 있어요.


막내는 조금 다르다. 해외를 다니시던 아버지는 막내가 대학생일 무렵부터 한반도의 물길을 주로 다니셨다. 그래서 어릴 때 기억 중 대부분은 엄마가 차지한다. 다만 막내니까, 용돈을 참 많이 주셨던 아버지의 기억은 선명하다.


아버지는 글쓰기를 즐기셔서 끊임없이 편지를 적어 보내셨다. 당신의 아내에게는 연애편지 같은 애정의 편지를 계속 썼고, 한참 자라는 딸 단속도 이틀에 한 번 꼴로 보내는 편지로 대신했다. 딸은 쓸 말도 없는데 매번 써야 하는 답장이 늘 힘겨워서 편지 받는 일이 버거웠다고 한다. 땅에 발 디디고 사는 딸은 더 적을 말이 없는데, 반복되는 수평선만 보았을 아버지는 무슨 하실 말씀이 날마다 새롭고 끝없었을까? 아버지는 세상의 바다를 떠도는 선장 생활을 마치며 그동안 받았던 편지를 모두 갖고 오셨다. 그리고는 그동안 당신이 쓰셨던 편지를 따로 모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참 서운해하셨다고 한다. 딸의 말이다.


세 남매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아버지는 조는 듯 고개를 숙이고 햇볕 아래 가만 앉아 있다. 2015년에 아내가 죽은 후 그는 조금씩 기력을 잃었다. 몸의 기력은 마음의 기력이기도 했던 것일까. 그는 치매 초기를 앓고 있다. 최근의 일부터, 먼 사람부터 하나씩 잊어간다. 그래서 아버지의 기억 중에 생생한 것은 지난 바다 위의 풍경이고, 세 자녀의 이름이다.


의자에 아버지를 앉히고 조명과 카메라를 맞추고, 리모컨을 넘겼다. 매일 보아서 더 이상 낯설게 없다 싶은 얼굴도 카메라 뷰파인더 안에 들어가면 새삼스러운 얼굴이 된다. 부모님을 조금 다른 거리에서 바라보기. 이번 이벤트에서 의도한 것이다. 아버지의 포즈를 고치며 세 자녀가 돌아가며 리모컨을 잡는다. 카메라는 넘겼으니 나는 계속 묻는다.


아버님,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다른 일을 해 볼 수 있다면 어떤 걸 하시겠어요?
모자 쓰는 일.
아니, 아빠. 어떤 직업을 갖고 싶냐고? 


아빠가 질문을 잘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딸이 말을 고쳐 물었다. 그는 손을 들어 쓰고 있는 모자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이 모자 쓸 거야.



세상을 항해하는 선장의 모자. 아버지의 뜻은 확고했다. 다시 젊어지고 다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면 다시 이 모자를 쓰고 바다로 나갈 거다. 그는 도대체 바다의 무엇이, 바다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그럼 다시 배를 타시면 어디를 가 보고 싶으세요?
여기저기. 안 가 본 데 다 가고 싶어. 너하고 안 가 본 데.


 영국 여자에게 모자도 선물 받고 소련 여자에게 손톱깎기도 선물 받으며 잘 나가던 선장은 이제는 고개도 들기 힘든 기력으로, 여전히 바다가 좋다고, 시원해서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 딸과 함께 못 가 본 온갖 곳을 가고 싶다.



여전히 아들, 딸이지만 이제 큰아들 나이도 환갑이다. 맞잡은 네 명의 손은 다 같이 주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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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일지

어쩌다가, 전시 일정이 잡혔다. 공간은 생겼지만 혼자 북을 치고 장구를 두드려야 하는 개인전이다. 오래 생각했던 아이디어 중에 하나를 꺼내 쓰기로 한다.


무엇이든 이름을 걸고 타인의 시간과 수고를 붙잡아 두려면 의외성과 개연성이 담겨야 한다.


1.

낚시바늘과 낚싯줄을 이용해서 돌을 매달았는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늘이 휘어졌다. 근처 낚시점에 가서 대형부시리를 잡는 14호 바늘을 사 왔다. 더 큰 바늘은 어선을 상대하는 어구점에 가야 살 수 있다고 했다. 바늘의 끝을 살짝 잘라내고 와이어에 연결했다. 돌의 무게감을 없애기 위해서.


2.

전체를 약간 뒤에서 비추는 라이팅 하나, 양변 라인을 보여주는 라이팅, 필요한 세부를 밝히는 라이팅, 배경을 구분하는 라이팅, 마지막으로 돌의 인상을 결정하는 라이팅을 세팅했다. 


3.

처음 시도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곳곳에 부족한 것이 보인다. 우선 해결할 것은 주인공과 배경의 분리가 지나치게 단호하다. 50mm 렌즈를 썼는데, 개조한 중형바디에 연결해서 틸트시켜 봐야겠다.


4. 

돌은 검어서 혹시 디테일이 먹힐까 걱정했다. 그 걱정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체 이미지가 다 보인다. 너무 보인다. 사람의 얼굴에 있는 그늘이 안 보인다. 


5.

강요배 선생님을 인터뷰할 때, 선생님께서 지나가듯 하신 말씀이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정말 스스로 인정할 만한 작품을 하면, 결국 사람들도 알아보더라 하셨다. 반대로, 대충 눈속임 하려 들면 그것도 드러날 것이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 지 몰라도, 최소한 나를 납득시킬 수 있는 사진들을 걸어야겠다.


6.

무슨 사진이든 모델은 중요하다. 한 동안 바닷가에 돌 찾으러 다니겠다.


7.

전시의 주제는 고래를 위한 포트레이트.

그 연작 중에서 이번 전시의 소재는 제주돌이다.



8.

조환진 선생을 만나야겠다. 내가 아는 한, 그 분만큼 제주돌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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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 후보자 촬영을 마치고,



# 1.

이제 날이 밝으면 아내와 아이와 함께 투표장으로 간다. 곰곰 생각해서 결정한 후보에게 앞으로 몇 년 잘 부탁한다고 투표할 작정이다.




# 2.

이번 지방선거에 나서는 세 명의 후보자를 촬영했다. 동등한 후보자의 지위는 오늘까지다. 투표일 저녁이 지나면 누구는 의원이 되고 누구는 야인으로 돌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사진은 대상에게 애정이 생기는 작업이니까 나는 세 후보가 모두 잘 되기를 바라지만, 내 사진이 그 세 명의 소망을 이루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지만 꿈이 언제나 이루어 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투표일 하루 앞서 사진을 전했다. 당선되는 이에게는 선거 기간의 각오를 잊지 말라고, 또 낙선하는 이에게는 그 패기로부터 다시 응원받으라고 전하고 싶었다. 




# 3.

최선을 다해서 찍었다. 찍은 사진 중에 선거문법에 맞는 사진들은 뽑혀서 명함도 되고 현수막도 되고 공보물도 되고 선거벽보도 되었다. 그리고 내 컴퓨터에는 아깝게 탈락한 사진이 수 천 장이다. 그 중에 마음에 드는 것들 몇 장을 골라서 작게 프린트하고 봉투에 넣었다. 봉투 겉에는 후보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몇 줄 적었다.


# 4.

촬영장에 동행한 후보의 가족들은 참 든든해 보였다.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김영삼을 외치며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셨고, 내가 중학생일 때 시의원 선거에 낙선하셨고, 내가 고등학생일 때 당선되셨다. 너무 어려서, 집 떠나 살아서, 아버지 선거를 한 번도 도운 적이 없다. 사진을 시작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니까 사진 제법 찍는다면서 아버지 선거 포스터 한 장 찍어드리지 못 했다. 아버지, 아버지.




# 5.

윤춘광 후보는 그 중에 가장 마음이 가는 후보다. 그에게 전하는 메모는 특히 마음 쓰였다.

"옳은 것을 마음껏 말할 수 있는 오늘이, 얼마나 많은 선배들의 헌신으로 얻어낸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꿋꿋한 세상의 선배로 남아주십시오."


# 6.

좀처럼 안 될 것 같은, 예쁘기는 하지만 이상적인 공약을 들고 나오는 후보들이 있다. 몽상가들이다. 흙을 움켜쥔 나무 뿌리처럼 현실에 처절하게 붙들려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은 멀다. 그런 말보다는 생활에 가까운,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를 주겠다는 말이 설득력 있다. 나도 당장 힘을 보태서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후보에게 투표할 작정이다. 그러나 한 걸음씩 걷는 자들의 도도한 흐름이 역사를 살려왔다면 걸음의 방향을 바꾸는 도전을 멈추지 않은 자들이 역사의 지향점을 만들어 왔다. 먹고 사는 일이 시급해서, 당장 내 지역과 내 나라가 처한 현실이 긴급해서 나는 표를 던지지만, 방향을 바꾸려는 자들의 목소리도 응원한다. 다음 선거 때는 그런 사람들의 포스터라도 찍어주고 싶다. 시켜만 주면.


# 7.

대통령이 가셨을 때 나는 한국에 없었다. 바다 건너 차려진 분향소만 겨우 들렀다. 그 뒤로 한참 동안 마땅히 있었어야 할 자리와 시간에 못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애써 외치고 노력해서 만든 좋은 시절에 나는 공으로 실려 간다. 빚진 거다. 그러니까 나도 내가 가진 힘을 보태야 마땅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이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사진 몇 장 만들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시대에 분노하고 촛불을 들고 노란 리본을 매달던 사람들에게 진 신세를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


# 8.

이번 선거 프로젝트는 배경완과 함께 했다. 그는 서귀포 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오래 만나지 않았지만, 말이 헛도는 것을 경계하고 실체를 구하는 사람이다. 좋은 작업을 믿고 맡겨 주어서, 까다롭게 전체 과정을 감독해 주어서 순조롭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번 작업의 진행과 결과는 모두 배경완 덕분이다.





# 9.

후보에게 전하지도 았았고 어디에도 쓰이지 않았지만, 이번 작업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사진은 임시 스튜디오에서 텅 빈 공약판을 들고 선 후보의 사진이다. 텅 빈 감귤선과장에 급하게 차린 촬영세트에 후보는 서 있다. 정치인이라면 무릇, 보는 사람 없어도 신념을 지키고, 들어주는 이 없어도 신념을 외쳐야 한다. 부디 그래 주기를, 그래서 바르고 선한 정치인이 다시는 외롭게 쓰러지는 일 없기를 바라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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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작업노트 170317 2pm.

강요배 작업노트 170317 2pm.







오후 2시에 작업실 앞에 도착했다. 작업실은 큰 길에서 빗겨난 작은 길에 있다. 입구는 낮은 나무 대문이다. 대문 너머로 마당까지는 가파른 내리막이다. 이 내리막 덕분에 작업실은 길 밖에서는 지붕만 보인다. 엎드려서 감춘 작업실이다. 덩굴로 덮인 옛 작업실 옆에 새 작업실을 지었다. 2014년에 새로 지은 작업실은 노출콘크리트다. 보기 좋으라고 만든 것하고 달리, 아무 것도 덧대지 않은 그냥 콘크리트다.


선생은 마당에 서 계셨다. 한쪽 평상에는 한라봉 몇 개, 낫 하나와 방금 벗은 듯한 장갑이 놓여 있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정원 일을 하신다고 했다.


“차 갖고 오셨어요?”


선생의 첫 질문이다. 주변에서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선생은 술을 많이 좋아하신다고 했다. 그러니까, 저 질문은 음료 선택을 위한 것이다. 술이냐? 아니냐?


다행히(?) 나는 차를 갖고 왔다. 낮술은 피한 셈이다.





작업실 안에는 작업중인 그림 몇 개가 있었다. 1993년 제주신문이 그림 아래 놓여있었다. 연동 개발을 시작한다는 기사가 메인이었다. 


마당 평상에 앉아서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했다. 선생은 빗겨 앉으셨다. 작업 의도를 설명하고, 고래를 위한 포트레이트. 글을 보여드렸다. 내가 찍을 사진에 대해 그보다 나은 설명이 없을 듯해서였다.


“허허, 그럼 내가 고래고, 반 선생이 에이헤브 선장인가?”


선생님, 싸우자고 제가 온 건 아니고요.;;


30분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 가봤더니 거기 술이 참 좋았더라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다. 




40대에 10여년을 산으로 들로 다녔어요. 제주의 거의 모든 땅을.


이런 바다 저런 바다, 수백의 나무를 보았습니다.


이제는 끄집어 내어 쓰지요. 화면에 쏟아낸다, 관찰은 큰 문제가 아닌 시기지요.


율만 형성되면.


제주 구름, 제주 나무, 제주 돌.







몇 마디 말을 받아 적고, 첫 인사를 마쳤다.


1년쯤 찍어보자고 선생께 말씀드렸다. 


서로 부담 안 되게 합시다. 나도 편하게 할게요.

어디 한 번 해봅시다.


원하던 답이다.



강요배. 작업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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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입감자 M/D Reply

    짝짝짝..축하합니다.
    소원푸셨네요. ㅎㅎ.
    부럽기도하네요.
    기대합니다.

  2. 멜랑콜리 M/D Reply

    축하해요^^

@Jeju/Backstage

profoto B2 테스트 촬영. 발레리나, 연주자



profoto의 휴대용 조명 B2 리뷰어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다. 프로포토는 상업사진가들이 가장 신뢰하는 조명 브랜드 중에 하나이고, B2는 프로포토에서 만든 신형 휴대용 조명이다. 마침 2년 정도 전부터 B1 두 대를 쓰고 있었다. 제주와 상하이를 오가는 생활을 시작하면서 매번 조명과 카메라 장비를 가져다니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 비행기 수화물 규정은 갈수록 까다로워져서, 드물게 생긴 B1 베터리 네 개는 매번 공항에서 꺼내고 넣기를 반복해야 했다. 상하이와 제주에 따로 조명을 마련해야 하나 고민중이었는데 마침 B2를 써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얼른 신청했다.


프로포토 조명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리뷰로 쓸 생각이니 접어두고, 촬영 이야기만 간단하게 적는다.


카메라를 제외한 모든 촬영 장비는 모두 상하이에 두고 왔다. 조명 삼각대도 없고, 라이트닝 툴도 없다. 필터도 없고, 무엇보다 내 든든한 어시, 알렌도 없다. 그리고 부러진 발은 깁스를 떼어낸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나도 절뚝거리고, 촬영도 절뚝거릴 것이다.  어쨌든 리뷰용 조명은 받아들었으니 진행은 해야겠고. 




# 1.


무용가는 언제나 탐나는 피사체다. 예술가는 다양한 소재와 기술, 방식으로 세상을 표현한다. 그 중에 다른 도구의 도움 없이 오로지 몸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은 춤과 노래다. 손가락 마디 끝까지 감정을 담고 무대를 장악하는 몸짓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춤추는 사람의 몸은 참 예뻐서 볼 때마다 갖고 싶다.


낮은 기온에 바람도 분다. 모델은 괜찮다며 포즈를 잡아준다. 외부 광이 치마를 넘어오는 정도의 밝기를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맞춰 다른 조명을 설치했다. 무용가의 잔근육을 강조하는 것이 이번 조명의 핵심이다. 나는 포트레이트 사진가니까, 사진 속에 모델의 이야기가 담기면 좋겠다고, 생각만 그렇게 했다.


이동 중에 우리는 발레와 한국무용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국무용은 발레에 비해 무용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더 길고, 시간이 지날 수록 표현 또한 더 나은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 이나경은 그 과정을 '짙어진다'는 단어로 말했다.


아, 짙어진다.


귀한 단어 하나를 건졌다. 기술의 성숙이나 관록, 숙련 등의 개념을 생각하기는 했었다. 짙어진다.는 떠올려본 적 없는 단어다.


"현대예술과 달리 전통예술은 어떤 원형을 보다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 목표를 둔다. 현대예술에서 강조하는 새로움, 창의성에 대한 추구가 없는 전통예술가는 어디서 가치를  찾아야 하나?"


예전에 경극 배우를 인터뷰할 때 던진 질문이었다. 배우는 뭐라고 답하기는 했는데, 사실 기억에 안 남아있다. 그때의 내가 짙어진다.는 단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어도 될 텐데.라고, 이나경의 짙어진다.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김훈은 그의 글에서, 나이가 들 수록 주먹 안에 쥔 모래알처럼 단어가 빠져나간다고 적었다. 그래서 한 줌 되지 않는 단어로 겨우 쓴다.고 적었다. 기억하기에는.


내가 갖고 있는 한 줌 안 되는 단어의 목록에 짙어진다.를 보탠다.




날씨는 예상과 달랐고 열악한 현장 상황은 답답했다. 그래서 결과물은 또 의도와 달랐지만 그게 한 두 번이던가.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요.







# 2.


리뷰용 조명을 받아들고 제주로 내려오는 공항에서 악기 가방을 맨 흑인 연주자를 봤다. 대충 눈치를 보니 우리는 목적지가 같구나.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찍어야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촬영하기로 약속했다. 며칠 뒤, 서귀포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마마두를 다시 만났다. 여기 박물관에서 연주자로 일하는 마마두는 세네갈 사람이다. 동료로 만나서 결혼한 아내와 이제 갓 한 살을 넘긴 아들은 세네갈에 살고 있다. 어쩌면 마마두도 몇 달 뒤에 세네갈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대충 지도를 보고, 대충 여기쯤 풍경이라도 하나 있겠지 싶은 곳으로 차를 몰았다. 썰물에 바다가 밀려나가고 작은 물웅덩이 건너편에 세우고 웃통을 벗겼다. 신발도 벗겼다. 바람은 불지만 미안 미안. 얼른 찍고 끝내줄게. 


음, 상황은 마음같지 않았다. B2는 내가 익숙한 B1보다 광량이 부족했고, 겨우 며칠 전에 목발을 놓은 내 다리는 여전히 절뚝거렸고, 바위는 거칠었고, 급하게 구한 일당 어시는 빛을 볼 줄 몰랐다. 미안해, 마마두. 옷 다시 입으세요.


리뷰용으로 제공해야 하는 사진 몇 장을 아쉬운 대로 찍고, 장소를 옮겼다. 슬슬 해가 지려고 한다. 기대했던 붉은 노을은 없지만 뭔가 찍기는 해야 한다. 이제 막 수능을 마친 고3 알바생을 험한 바위 위로 올리고 조명을 맡겼다. 우리, 딱 한 장만 하자.


겨우 마음에 드는 한 컷을 건지고 깜깜해진 해변에서 조명을 정리했다.


돌아와서 생각하니, 마마두의 연주를 모르겠다. 연주자를 찍는데 음악이 기억에 안 남았다. 서툰 촬영이었다.









#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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