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oto B2 테스트 촬영. 발레리나, 연주자
profoto의 휴대용 조명 B2 리뷰어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다. 프로포토는 상업사진가들이 가장 신뢰하는 조명 브랜드 중에 하나이고, B2는 프로포토에서 만든 신형 휴대용 조명이다. 마침 2년 정도 전부터 B1 두 대를 쓰고 있었다. 제주와 상하이를 오가는 생활을 시작하면서 매번 조명과 카메라 장비를 가져다니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 비행기 수화물 규정은 갈수록 까다로워져서, 드물게 생긴 B1 베터리 네 개는 매번 공항에서 꺼내고 넣기를 반복해야 했다. 상하이와 제주에 따로 조명을 마련해야 하나 고민중이었는데 마침 B2를 써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얼른 신청했다.
프로포토 조명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리뷰로 쓸 생각이니 접어두고, 촬영 이야기만 간단하게 적는다.
카메라를 제외한 모든 촬영 장비는 모두 상하이에 두고 왔다. 조명 삼각대도 없고, 라이트닝 툴도 없다. 필터도 없고, 무엇보다 내 든든한 어시, 알렌도 없다. 그리고 부러진 발은 깁스를 떼어낸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나도 절뚝거리고, 촬영도 절뚝거릴 것이다. 어쨌든 리뷰용 조명은 받아들었으니 진행은 해야겠고.
# 1.
무용가는 언제나 탐나는 피사체다. 예술가는 다양한 소재와 기술, 방식으로 세상을 표현한다. 그 중에 다른 도구의 도움 없이 오로지 몸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은 춤과 노래다. 손가락 마디 끝까지 감정을 담고 무대를 장악하는 몸짓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춤추는 사람의 몸은 참 예뻐서 볼 때마다 갖고 싶다.
낮은 기온에 바람도 분다. 모델은 괜찮다며 포즈를 잡아준다. 외부 광이 치마를 넘어오는 정도의 밝기를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맞춰 다른 조명을 설치했다. 무용가의 잔근육을 강조하는 것이 이번 조명의 핵심이다. 나는 포트레이트 사진가니까, 사진 속에 모델의 이야기가 담기면 좋겠다고, 생각만 그렇게 했다.
이동 중에 우리는 발레와 한국무용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국무용은 발레에 비해 무용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더 길고, 시간이 지날 수록 표현 또한 더 나은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 이나경은 그 과정을 '짙어진다'는 단어로 말했다.
아, 짙어진다.
귀한 단어 하나를 건졌다. 기술의 성숙이나 관록, 숙련 등의 개념을 생각하기는 했었다. 짙어진다.는 떠올려본 적 없는 단어다.
"현대예술과 달리 전통예술은 어떤 원형을 보다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 목표를 둔다. 현대예술에서 강조하는 새로움, 창의성에 대한 추구가 없는 전통예술가는 어디서 가치를 찾아야 하나?"
예전에 경극 배우를 인터뷰할 때 던진 질문이었다. 배우는 뭐라고 답하기는 했는데, 사실 기억에 안 남아있다. 그때의 내가 짙어진다.는 단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어도 될 텐데.라고, 이나경의 짙어진다.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김훈은 그의 글에서, 나이가 들 수록 주먹 안에 쥔 모래알처럼 단어가 빠져나간다고 적었다. 그래서 한 줌 되지 않는 단어로 겨우 쓴다.고 적었다. 기억하기에는.
내가 갖고 있는 한 줌 안 되는 단어의 목록에 짙어진다.를 보탠다.
날씨는 예상과 달랐고 열악한 현장 상황은 답답했다. 그래서 결과물은 또 의도와 달랐지만 그게 한 두 번이던가.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요.
# 2.
리뷰용 조명을 받아들고 제주로 내려오는 공항에서 악기 가방을 맨 흑인 연주자를 봤다. 대충 눈치를 보니 우리는 목적지가 같구나.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찍어야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촬영하기로 약속했다. 며칠 뒤, 서귀포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마마두를 다시 만났다. 여기 박물관에서 연주자로 일하는 마마두는 세네갈 사람이다. 동료로 만나서 결혼한 아내와 이제 갓 한 살을 넘긴 아들은 세네갈에 살고 있다. 어쩌면 마마두도 몇 달 뒤에 세네갈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대충 지도를 보고, 대충 여기쯤 풍경이라도 하나 있겠지 싶은 곳으로 차를 몰았다. 썰물에 바다가 밀려나가고 작은 물웅덩이 건너편에 세우고 웃통을 벗겼다. 신발도 벗겼다. 바람은 불지만 미안 미안. 얼른 찍고 끝내줄게.
음, 상황은 마음같지 않았다. B2는 내가 익숙한 B1보다 광량이 부족했고, 겨우 며칠 전에 목발을 놓은 내 다리는 여전히 절뚝거렸고, 바위는 거칠었고, 급하게 구한 일당 어시는 빛을 볼 줄 몰랐다. 미안해, 마마두. 옷 다시 입으세요.
리뷰용으로 제공해야 하는 사진 몇 장을 아쉬운 대로 찍고, 장소를 옮겼다. 슬슬 해가 지려고 한다. 기대했던 붉은 노을은 없지만 뭔가 찍기는 해야 한다. 이제 막 수능을 마친 고3 알바생을 험한 바위 위로 올리고 조명을 맡겼다. 우리, 딱 한 장만 하자.
겨우 마음에 드는 한 컷을 건지고 깜깜해진 해변에서 조명을 정리했다.
돌아와서 생각하니, 마마두의 연주를 모르겠다. 연주자를 찍는데 음악이 기억에 안 남았다. 서툰 촬영이었다.
#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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