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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항해일지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너무 만연한 것 같아서 잘 쓰지 않으려고 하는 단어다. 신체적 부상에 따르는 정신적 후유증. 살면서 크게 겪어본 적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며칠 바다에서의 내 상황은 트라우마라는 단어 외에 쓸 것이 없다. 지난 겨울 그날, 세 번의 전복 이후 바다는 어찌나 무서운지.

 

오늘은 코치님도 육지에 가셔서 바다에 아무도 없었다. 바람은 북서풍이 6m/s로 불었는데 파도의 골이 깊었다. 오전 10시 조금 전에 도착해서 준비하고, 배를 채비해서 나갔다. 큰 숨을 여러 번 내쉬고서야 바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의 90도 방향으로 만들어지는 코스를 빔리치라고 부른다. 우선 긴장도 풀겸 빔치리코스를 여러 번 오갔다. 부드럽고 정확한 테킹 동작을 여러 번 해보고, 이제 되겠다 싶어서 뱃머리를 돌려 우선 런코스를 타고 풍하로 갔다. 거기서 다시 테킹.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가상의 목표를 정하고 홀드 코스를 따라 지그재그로 바람을 거슬러 갔다. 계속 정확하고 부드러운 테킹을 신경쓰며 배를 몰았다. 서너 번 그렇게 타고, 스타트라인에서 배를 멈추고 기다리는 연습을 조금 했다. 런코스에서 조금 더 속도를 높이기 위해 시트를 당기는 연습도 해보았다. 유튜브에서 본 것들이다.

 

구해줄 수 없으니 조심해서 타라는 코치님의 당부도 있었고, 이 바다에서 한 번 뒤집히면 제법 고생을 할 것 같아서 겁도 많이 났다. 항을 많이 벗어나지 않고 조심해서 타다가 결국 한 번 빠졌다. 배가 뒤집힌 것은 아니고,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에 발이 안 걸리면서 빠졌다. 다행히 물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고, 메인시트를 잡고 있어서 금방 다시 올라왔지만 놀란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우선 배를 바람 방향으로 세워서 잠시 숨을 돌리려고 했는데 파도가 높아서 그마저 쉽지 않았다. 잠깐 더 타고 서둘러 귀항했다.

 

만약에, 지난 겨울 캡사이즈 이후로 배를 더 이상 타지 않았다면 이 두려움을 평생동안 갖고가야 했을까. 다행스럽게 나는 적당히 나이가 들었고, 경험치도 쌓였다. 많은 종류의 두려움은 직시하고 도전하며 극복해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은 다시 배에 오를 때마다 가슴이 떨리고 무섭지만, 이 상황에 더 자주 나를 노출시키면 조금씩 나아지고 마침내 예전보다 훨씬 바람을 잘 읽고 배를 잘 움직일 수 있게 될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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