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위한 포트레이트
소설 모비딕은 고래를 쫓는 포경선의 이야기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결코 점령할 수 없는 것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어 마침내 바닥까지 철저하게 부서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극적인 반전이나 고난 뒤의 부활같은 것은 없다. 다만 달려들어 죽는다. 부서져서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배는 다시 떠오르는 않는다. 소설은 그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묵묵히 갈 수 밖에 없는, 그것도 가진 힘을 모두 써 돌진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위로다.
거대한 흰 고래 모비딕과 고래를 쫓는 피쿼드 호의 에이헤브 선장은 서로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나선 여행자 같다. 여행자 중에서도 특히 고집이 샌 여행자쯤 될 것이다.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에이헤브의 고래뼈로 만든 다리와 포경선을 향해 돌진하는 모비딕의 지느러미는 종말을 향해 전진하는 같은 물건이다. 날을 벼른 에이헤브의 작살과 포경선의 옆구리를 들이받는 모비딕의 이마도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같은 물건이다.
살아가는 일의 큰 틀은 비극인 듯싶다. 죽는다는 사실 앞에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반응한다. 강하게 거부하기도 하고, 죽은 듯 고개를 내려놓기도 하고, 잊은 듯 살기도 한다. 종교를 통한 초월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죽음을 향해 또박또박 자신의 의지로 걸어가는 고래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살을 선택하는 부류가 아니다. 그들은 죽음을 모른 채 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도망치려고 하지도 않고, 종말은 상관 없다는 듯 밤을 새워 노래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죽음을 곧바로 쳐다보고, 죽음이 거기 있다면 온몸으로 달려가 부서지겠다는 각오로 덤벼든다. 종말을 향한 단단한 전진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이 비극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 걸음은 순결해 보인다. 아무 것도 덧대지 않고,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지 않아서 아름다워 보인다.
드물기는 해도 일생을 고래처럼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보다는 빈번하게, 누구나 한때쯤은 고래처럼 살았던 적이 있다. 어떤 사태 앞에서 누군가는 고래가 된다. 좌절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에둘러 가지도 않는다. 당신 앞에 놓인 벽을 향해 당신의 몸과 마음을 집어 던지던 때가 있었다. 네가 깨어지지 않으면 내가 파멸하겠다던 그때를 지나 왔다. 당신은, 당신의 고래를 기억하고 있는가?
‘삶’이라는 단어를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때이른 건방 같지만, 언젠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마냥 아껴놓을 수는 없는 단어가 아닌가. 고래가 나타난다면, 내일 같은 건 없는 거니까.
당신의 깊은 바다에서, 고래는 헤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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