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짧은 글 모음
2012.12.20 08:15
어제 출근길에 뮤지컬 명성황후 OST를 가져갔다. 딴에는 혼자라도 승리의 축배를 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내에게 출구조사 결과를 전해듣고도 어쩐지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피부에 와닿았던 그 기운들은 모두 같은 편이었다. 모두 상식의 편이라고 믿었다. 아직 개표율이 낮은 서울지역의 상황에 기대를 걸면서도, 50만표를 넘어 점점 격차를 키우는 것을 보며 패배를 인정했다.
명성황후 엔딩곡은 '애통하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안타까운 백성들의 처지를 걱정하는 황후의 말, 일본의 간악함에 분노하는 황후의 말이 뒤따른다. 그리고, 동녘의 붉은 해를 스스로 지키라는 당부와 합창으로 노래는 끝난다. 나는 별로 한 것이 없어서, 조용히 울었다.
승리한 것은 비상식이 아니라 다른 편에 있는 상식이었던 것일까? 그렇게 믿어야 하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해는 뜨고 사람들은 출근하고 나는 예정된 촬영을 나서는 구나. 살면서 이런 크기의 좌절을 몇 번이나 겪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많았다. 아버지와 처음 다투고 아버지의 작은 어깨를 보았던 때, 작문 시험지를 0점 받았던 때, 원하는 대학 불합격 전화 안내를 받았던 때, 크게 기대했던 계약이 깨졌던 때, 내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때, 그리고 대통령께서 가셨던 그 날도 있다. 그 시간들을 지나면서 나는 오늘 살아있지 않나. 그 사건들을 계기로 조금 변하면서 여기까지 왔지 않나. 결론은, 살아야겠다.
좌절할 자격이 부족하다. 몸을 던져 선거운동을 한 것도 아니다. 현장에 뛰어들어 주먹을 쥔 것도 아니고, 하다 못해 웹 상에서 작은 투쟁이라도 한 것이 없다. 박근혜를 찍겠다는 지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치열하게 그들을 설득할 시도도 못 했다. 나는 겨우 마음으로 응원했다. 나는 좌절할 자격도 부족하다.
성실하고 단단하게 살아야겠다. 당분간 포털사이트는 접속하지 않을 작정이다. 덕분에 에프상하이와 내 블로그, 웨이보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겠다. 그래, 덕분이다.
2012.09.18 15:47
계절이 변해갈 때,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새삼스럽다. 가을이 온다. 저녁 샤워 마치면 몸에 닿는 바람이 더 이상 시원하지 않고 서늘하다. 새벽 출근길 햇빛을 피하지 않아도 된다. 의지와 상관 없이, 슬슬 하나둘 마무리 되어야 한다.
세상의 끝에 닿으면, 조르바와 모비딕을 다시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조르바가 죽기 직전에 통곡했던 이유를 나는 아직 모르니까, 세상의 끝쯤에는 그런 답도 있지 않을까. 모비딕이 감추어 둔 사는 일의 신비같은 것도 거기에서는 두엇쯤 드러나지 않을까. 세상의 끝이니까. 그곳에서 나는 호탕한 마음으로 조르바를 먼저 읽고, 벌거벗은 단독자의 각오로 다시 모비딕을 읽을 것이다. 크고 낡은 흰고래 모비딕과 대칭점에 서 있는 것은 에이헤브 선장도 아니고 주인공 이슈메일은 더 아니다. 낡은 배 피쿼드 호와 세 갑판장으로 대표되는 그 배의 선원들이 고래의 맞은 편에 서서 같은 종말을 바라보고 나아간다.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끌려들어가고 마침내 침몰한다.
나는 요즘 사람마다의 잡지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글을 쓰고, 사람에게 묻고, 사진을 찍고, 잡지를 만드는 일들을 돈벌이로 해왔다. 이제 모두 함께 한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어서 인터뷰는 문장으로 만들고 사진과 함께 잡지로 엮어 낸다. 한 사람이 주인공인 잡지다. 그 잡지로 돈을 번다.
2012.09.10 10:06
마지막으로 여기에 쓴 것이 지난 4월 말이구나. 오래 됐다. 4월 말쯤이면 작업실을 열고 두어 달이 지났을 무렵인가. 아득하다. 계획은 여럿이었는데 작은 계획들은 저들끼리 모이면서 덩치를 키워서 좀처럼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해졌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날마다 눈앞에 닥치는 것들을 겨우 넘으면서 지난 몇 달을 지나왔다. 많은 것이 여전히 모자르고 숨은 여전히 턱 아래 어디쯤까지 차오른 상태인 듯하다. 그래도, 한 눈에 다 담기지 않는 괴물처럼 몸집을 키운 계획의 덩어리에 작은 바람구멍이라도 내야 하니까, 그래야 조금씩 털어질 테니까, 다시 쓰기를 이어가야겠다. 새로 찍은 사진들도 많고, 새로 생긴 사람들, 새로 나눌 이야기도 많다. 정리해서 올려 두어야 하는 묵은 이야기들도 많다.
아침에 시장에 갔다. 잠결에 아내의 주문서를 들었는데 대충 일곱 가지였다. 김치 다 먹었으니 새로 담그겠다고 말한 것이 벌써 한참인데 바쁘다는 핑계로 도와줄 수 없었다.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출근 전에 시장에 갔다. 우선 여기에서 파는 배추는 너무 물러서 김치 담그기에 적당하지 않으니까, 여기에서 와와차이.라고 부르는 조금 작은 배추를 샀다. 마늘, 양파, 감자, 부추, 생강, 두부, 매운 고추를 샀다. 대충 챙겨보다가 한 개가 모자라서 아내에게 전화해서 다시 물어야 했다.
두부를 사고 100위엔 짜리 지폐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20위엔짜리 세 장과 10위엔짜리 세 장을 받았다. 아저씨는 두부를 담근 물에 손가락 하나를 적신 다음 돈을 셌다. 받아 보니 지폐는 뻣뻣한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오래도록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온 돈인 듯싶었다. 게다가 특별히 구겨지거나 찢어진 부분도 없었다. 그러니까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곳을 떠돌아 다녔지만 인상 곱게 늙어간 사람의 얼굴같은 돈이다. 곱게 받아서 집에 오는 내내 산전수전 다 겪은 돈을 생각했다.
저녁에는 새로 담근 김치를 먹겠구나.
2012.04.21 23:51
07:00
아침 공항에 앉아서 비행기 출발 시각을 기다리며 지난 밤 파키스탄에서 발생한 비행기 추락사고 뉴스를 본다. 뉴스는 모자이크 처리 없이 잘려나가 기체에 깔린 죽은 몸을 보여주었다. 사고가 난 기종은 보잉737기종이라고 한다. 오늘 아침 내가 타고 갈 비행기는 어떤 기종일까?
23:50
구이저우 성의 성도, 구이양에 와 있다. 내가 타고 온 비행기는 A321 기종이었다.
2012.04.08 22:50
대학 때 썼던 노트 몇 권을 아직 갖고 있다. 대부분 안재흥 선생님 수업의 노트들이다. 열심히 들었던 강의였으니까, 그때 생각으론 아마 혼자라도 강의록을 보며 더 배울 것들이 있었던 모양이니까, 또 내 노력의 흔적들이 있었으니까 졸업 후 중국으로 오며 여러 책과 함께 가져왔었다. 전공과 전혀 상관 없는 사진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면서.
며칠 전에 우연찮게 강의 노트를 꺼내봤다. 중간중간 밑줄을 긋고 제법 여기저기 반론도 적어 둔 자료집이 있었다. 필기 잘 하는 후배의 노트를 복사해 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시험을 준비하며 따로 정리한 요약 노트도 있었다. 그때도 벼락치기는 여전했던 거니까 바쁜 마음은 글씨에 그대로 드러났다. 흘러가듯 페이지를 채운 글씨들은 그러나 정돈되어 있었다. 백지에 바쁜 마음으로 적어도 단정하게 이어진 글씨들이 지금 보아도 예쁘다.
손글씨가 점점 못 생겨진다. 몇 년째 속지를 바꿔가며 쓰고 있는 수첩 속에서, 내 글씨는 점점 더 못 생겨진다. 요즘에는 가끔 내 글씨가 참 미워 보인다. 제법 좋아하던 내 글씨가 몇 년 사이에 그렇게 되었다.
기억하기에, 누나는 참 예쁜 글씨를 썼다. 처음 글씨를 염두에 둔 것이 아마 중학교 무렵이었던 듯한데, 그때도 누나 글씨를 보며 부러워했던 것 같다. 가물하기는 해도. 스스로 필기하며 ‘내 글씨는 왜 이리 못 생겼나.’ 생각하기도 했었다. 이 기억은 분명하게도. 누나의 글씨를 부러워했던 정확한 기억은 고등학교 때다. 누나의 글씨는 기억나지 않고, 다만 그 글씨를 부러워했다는 기억은 난다. 그리고 더디고 성글기는 해도 꾸준히 글씨를 의식하며 글을 썼다. 제법 내 글씨가 마음에 들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도 제법 시간이 지난 뒤였지 싶다. 특징적인 형태를 갖춘 초기에는 그 특징을 과장하려는 서툰 의지가 글씨에 드러났을 것이다. 그리고 더 다듬어지면서 비로소 서툴고 과장된 의지는 속으로 숨고 쓰는 사람의 기질이 보이는 글씨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글씨가 마음에 드니 여기저기 편지 쓰는 일도 많았다. 메일로 안부를 주고 받다가도 언제 한 번씩은 손글씨로 편지를 썼다. 백지에 쓰기도 하고 따로 편지지를 마련해서 쓰기도 했다. 선생님이나 친구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도 있었고 연애 편지도 있었다.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샤오싱 근처에 있는 정원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말로만 듣던 왕희지의 글씨를 처음 보았다. 오리인지 거위인지 몇 마리가 떠다니는 작은 연못 앞에 왕희지의 글씨 두 글자를 새긴 큰 비석이 있다. 선이 굵은, 단호하고 굳건한 글씨였다.
한 번 익힌 글씨가 망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 배우고 나면 언제든 다시 탈 수 있는 자전거처럼, 한 번 익힌 글씨는 온전히 내 것이 되는 줄 알았다. 최근 수첩에 적은 내 글씨를 보면서, 쓰지 않으면 망가지는 것이 글씨라는 사실을 알았다.
최근에야 새롭게 든 생각인데, 전통 한자 서예야 말로 추상 미술의 절정이지 싶다. 한국의 고암 이응노 화백이나 중국의 국보급 화가 우관중 같은 이는 공통적으로 말년에 문자 추상을 작업한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서양적 회화 기법과 동양의 수묵 기법을 독창적으로 결합시킨 작품 세계로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문자 추상 작업은 서예의 길과는 다른 길을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서양 순수 추상의 발생기에 그것은 비명 소리에 가까웠다. 비명의 속뜻은 ‘에라, 어쩔 줄 모르겠다.’쯤 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잔뜩 있는데, 현실에 있는 단어들은 그 감정들을 담기에 어딘지 모자르고, 그렇다고 고정된 형태 속에 가두기는 답답하니 비명을 내지르는 것 밖에. 그때의 추상미술은 소통하자는 제안이나 아름다움을 공유하자는 선의가 아니라 누구든 제발 내 비명을 듣고 나를 구하러 와 달라는 구조 요청같은 것이다. 비명에는 논리도, 형식도 없다. 배워야 지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쯤이 태동기 순수추상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서예는 정제된 목소리다. 목소리지만 말이 아니고, 비명도 아니다. 논리로 구축된 언어가 아니다. 무게중심을 두는 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에 서예는 이미지의 문법 구조를 따르면서 문자 언어의 문법 구조에 한 다리를 살짝 걸친다. 사실 걸치는 것이 한 다리까지는 아니고, 체중의 아주 작은 부분, 내 체중이 거기에 실린다는 느낌은 없지만, 막상 없으면 신체의 균형을 미묘하게 불안하게 만드는 딱 그만큼을 언어의 문법구조에 의지하고 있다. 긴 시간의 수련을 통해 획 하나에 담아내는 오롯한 기운. 수련을 거치며 글씨는 곧 주인과 동일체가 된다. 그리고 안성맞춤 짝으로서의 한자. 한자는 서예와 짝을 이루는 문자다. 글자마다에 태생적으로 뜻을 담고 있는 뜻글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예를 예술장르로서 파악할 때 그 무게중심은 문장의 뜻보다 글씨가 구축하는 이미지의 완결성에 치우친다. 이런 경지를, 현대 추상이 흉내내기는 어렵다. (로스코의 작업은 비슷한 경지에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상하이 미술관에서 후안 미로의 전시를 보았다. 가기 전까지 미로가 누구인지 몰랐다. 아내는 내가 미로를 모른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내 예술 배경은 참 얕다. 어쨌든,
생각보다 큰 전시였다. 크고 작은 미로의 작품들은 수 백 점이나 되었다. 미로는 자신만의 문자를 보여주었다. 그의 문자는 상형문자의 태동기에 있는 것 같았는데, 문자 언어로서의 소통성을 획득하기 이전에 있는 원시 문자를 보는 듯했다. 그의 세계 안에서 온전히 소통하는 문자들은 아름다웠다. 예술은 당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는 아도르노의 말을 지지하지만, 그래도 미로의 작업들은 아름다움을 통해 의식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예술의 본래 목적이라는 오래된 말을 믿게 만든다.
그러니까 결론은,
손글씨를 좀 써야겠다.
덧붙임.
1.
안재흥 선생님께서는 주로 유럽정치와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강의하셨다. 나는 그 중에서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된 강의들을 들었다. 선생님께서 개설하신 강의는 유럽정치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쫓아다니며 들었는데, 강의 제목은 달랐지만 모든 강의의 결론은 같은 지점에서 맺혔다.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그랬다. 선생님의 강의는 강의실 안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 내가 생각하는 방식의 바탕이 되었다. 나는 사람을 만나고 작업을 진행하는 모든 과정에서 여전히 선생님께 배운 것과 그 연장선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 위에서 생각한다.
2.
검색해 보니 샤오싱에 있는 정원의 이름은 난정?亭이다.
3.
우관중은 중국의 서정적 풍경, 남방 지역의 마을 등을 그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그렸다. 그에 대해 일화 중 인성적인 것이 하나 있다. 우관중은 문화혁명 시기 지방으로 쫓겨 나 노동에 종사한다. 그림은 그릴 수 없었다. 언제 기회가 있어서 길을 나섰는데, 너무 그림이 그리고 싶었던 화가는 인상적인 풍경 앞에서 아내의 등에 캔버스를 올리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서 자꾸만 캔버스가 접히니까 답답한 화가는 그만 울어버렸다고 한다. 노 화백이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우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작가의 위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4.
고암 이응노 화백은 군상 등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언젠가 그의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어느 작은 갤러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본 지인이 와서 묻기를, 혹시 같은 작품을 두 개 그린 것이 아니냐? 하니 고암 화백은 "세상에 그릴 것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걸 두 번이나 그리겠나."라고 했다고 한다. 위작이라는 말이었다. 작품 후반기에 문자 추상 작업을 많이 한 것으로 안다.
5.
로스코.는 색면 추상 작가다.
6.
후안 미로.는 다다.의 시대를 관통한 작가다. 그의 작업은 당시 유행하던 의식의 흐름. 기법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2012.03.27 23:05
작업실에는 암장이 있다. 작업실 가운데 있는 콘크리트 기둥을 네 장의 합판으로 둘러싸서 만들었다. 합판 한 장의 규격은 122cm*244cm이고, 콘크리트 기둥은 네 면이 45cm의 정사각 기둥이다. 아래쪽은 높이 80cm까지 네 장의 합판을 세로로 길게 두르고, 그 위에 온전한 크기의 합판 네 장을 귀퉁이만 잘라서 얹었다. 위에 얹은 네 장의 합판은 아래쪽 폭이 45cm, 위쪽 폭은 122cm이다. 아래쪽에 붙인 네 장의 합판 두께를 미리 계산해서 기둥 두께에 보태야 했는데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렀다. 그래서 아래 합판과 윗 합판은 아귀가 딱 들어맞지 않고 조금 엇나가 있다. 네 장의 큰 합판은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넓어져서, 이어 붙이면 앞쪽으로 기울어진 형태가 된다. 처음 생각에는 네 장 합판이 서로 붙어서 깔끔한 모습을 계획했던 것인데, 그랬을 경우 기울기가 충분하지 않아서 운동량이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최종 형태는 합판의 모서리가 서로 닿지 않고 가운데 기둥이 들여다 보이는 모양이다. 기둥에는 따로 드릴 구멍을 내거나 볼트를 박지 않았다. 네 장의 합판을 와이어와 나무 지지대로 이어서 기둥에 밀착하도록 했다. 처음에 주문한 합판은 16mm짜리 였는데, 나중에 배송받은 해바라기 너트가 더 두꺼워서 다시 2mm짜리 두께의 합판을 네 장 더 사서 붙였다. 겨우 두께를 맞췄다. 합판이 힘을 받을 수 있도록 세로 지지대를 두 개씩 대었다. 그리고 합판 한 장에 약 40개 정도의 구멍을 뚫었다. 12mm 드릴 날을 따로 주문해야 했다. 인공 등반에 쓰는 홀더들은 일반적으로 10mm 볼트로 고정한다. 이때 충분한 지지력을 얻기 위해 합판 뒤쪽에 12mm 지름의 해바라기 너트를 미리 박고, 앞쪽에서는 해바라기 너트에 볼트를 고정하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홀더가 겉돌지 않고 지탱하는 힘도 강해진다. 네 면 중에 한 면은 홀더 대신 보드 위주로 만들었다. 손가락 근육과 등 근육을 단련하는 목적인데, 난이도가 높아질 수록 등과 겨드랑이 근육을 더 많이 쓰기 때문에 꼭 필요한 훈련이다. 합판은 근처 목재상에 주문했고, 홀더와 너트 볼트 등은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중간에 몇 번의 설계 수정까지 겹쳐서, 모두 만드는 데는 2주 가까이 걸렸고, 4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삼중으로 안전 장치를 했으니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일은 없겠지만, 아마추어가 뚝딱거리며 만들었으니 살짝 삐걱거리기는 한다.
암벽 등반을 운동으로 시작한 지 2년쯤 되었다. 중간에 반 년 넘게 쉬기는 했지만 나름 꾸준히 하고 있다. 상하이에는 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어서 진짜 바위를 탈 기회가 적다. 그래서 운동은 주로 시내 몇 곳에 있는 인공암장에서 한다. 볼더링을 할 수 있는 구역이 있고, 높이 20미터쯤 되는 벽들이 몇 개 있다. 일요일에는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과 정기 모임이 있고, 평일에는 두 번 정도 따로 나가서 운동했다. 이제 작업실에 암장이 있으니까 실내 암장에는 일요일에만 가고 평일에는 틈틈이 작업실에서 매달린다. 작업하다가 지루하면, 밥 먹고 졸리면, 괜히 심심하면 암벽에 매달린다. 한 번 기둥을 돌아오는 데 2분 정도가 걸리니까, 다섯 바퀴를 돌면 10분이 조금 못 걸린다. 얼마 안 해도,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제법 많은 도움이 된다.
아내는 내가 너무 암벽만 좋아하니까, 다른 운동도 해 볼 것을 권한다. 동의하면서도, 당분간은 암장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 예전에 했던 다른 운동들에 비하면 암벽은 내게 더 맞는 운동 같다. 대충 하기는 했어도 몇 년 동안 검도를 했으니 팔 힘의 기본은 다진 셈이고, 몸이 가벼우니 더 적은 힘으로 멀리 갈 수 있다. 상대와 승부를 겨루는 것도 아니고, 어제보다 조금 더 높이 가고 어제보다 조금 더 어려운 동작을 성공하면 된다.
매주 일요일 아침에는 일찍 깬다. 시계를 보고, '아직 시간이 안 됐네.'아쉬워하면서 다시 조금 더 잔다. 소풍가는 어린 아이 같다. 암장이 좋은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아마 단순하기 때문인 듯하다. 몸이 바쁘지 않아도 마음이 바쁜 날들이다. 닥쳐올 일들을 생각하면 막막한 날들이다. 그런 중에 암벽에 있는 동안에는 다른 모든 것을 접어둘 수 있다. 다음 번 잡아야 할 홀더와 그 홀더를 잡기 위해 몸의 균형을 잡는 문제만 생각하면 된다. 어떻게 하면 떨어지지 않고 저기까지 갈 수 있을까? 문제는 단 한 가지면 된다. 실패하면 어떤가. 떨어지고 다시 붙으면 그만이다. 사방이 길이기도 하고 사방에 길이 없는 것도 같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막막한 평원에서 일요일마다 수직의 벽으로 탈출하는 셈이다. 벽을 오를 때, 안 좋은 버릇이기는 한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간다. 암벽은 오르는 사람과 오르는 사람의 안전을 확보하는 사람이 한 가닥의 줄로 이어져 있으니까 둘 사이의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어폰으로 귀를 막는 것은 사실 위험한 행동이다. 자연암벽이나 처음 가는 코스에서는 조심해야겠지만, 인공암장에서 어려운 코스를 갈 때는 꼭 음악을 듣는다. 사방의 소리로부터 떨어져서 벽하고 나만 있다. 가다가, 가장 어려운 구간에 진입하기 전에 숨을 돌리면서 음악을 바꾼다. 가장 어려운 구간에서 듣는 음악은 언제나 한 곡이다. 응원가 같은 곡을 들으면서 점점 빨라지고 높아지는 음에 박자 맞추면서 공중에 혼자 매달려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세상에서 몇 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때가 흔하지는 않은 거니까.
날씨가 제법 풀려서 곧 봄이 올 것을 알겠다. 맴버들과 두어 달 전부터 벼르고 있다.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이니까 어려운 벽은 못 가겠지만, 아마 4월 중에는 항주에 있는 작은 바위 벽으로 갈 거다. 온몸이 뻐근하도록 바위를 타고 와야겠다.
2012.03.07 23:55
자정이 가깝다. 조금만 손보고 잘랬는데, 밤이다. 밖에는 빗물을 가르며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난다.
사이트를 고쳤다. 깔끔해졌다. 복잡한 것들을 다 치우고, 제로보드에서 지원하는 기본 기능만 활용해서 클릭 몇 번으로 만들었다. 클릭 몇 번이라고는 해도 이것저것 물어보고 고르느라 또 며칠은 걸렸다. 사이트를 고친 이유는, 새 작업실 사이트를 따로 오픈하면서 사진 관련 자료를 모두 옮겼기 때문이다. 새 작업실 사이트는 www.spacewhu.net이다.
뭔들, 어느 시간인들 그렇지 않겠냐만 또 많은 것들이 변했다. 차근차근 적으려고 한다.
몇 년간 생각만 하던 잡지를 또 부여잡는다. 이번에는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이미지 잡지다.
좋은, 마음에 드는 새 집이다. 잘 써야겠다.
2012.01.08 08:41
책상을 정리하는 심정으로, 한 번쯤 깔끔하게 정돈하고 싶은 날들이다. 할 수 있는 말도 많지 않은데, 너무 오래 말하지 않고 지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 천천히 복기해보고 싶어지는, 그러니까 내가 눈치채지 못 하고 놓치고 지나는 작은 조각들이 군데군데 박히는 날들이다.
새 작업실을 열었다. 어수선하다. 한 동안 분주하게 내부 인테리어를 했다. 제한된 견적 안에서 하려니 직접 발로 뛰고 직접 손으로 만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직접 하고, 직접 찾아서 주문하고 받아서 만들었다. 손과 시간이 많이 갔고, 결과물은 전문가의 작업에 한참 못 미쳤다.
여전히, 세상에 빚지는 마음으로 산다. 한 평생 빚을 지고 산다. 미안한 마음만 자란다. 이런 텅 빈 문장은 안 좋다. 말 하려는 내용은 없고 다만 들어주기를 바라는 의지만 내세우는 비겁한 문장이다. 어서, 속이 단단한 문장을 쓸 수 있도록, 좋은 생활을 구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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