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짧은 글 모음
2014.12.17 10:20
Test Shoot.이라는 말머리로 그 동안 찍었던 촬영 현장 이야기를 정리한다. 작은 읽을거리라도 만들 수 있을까 싶다. 나름대로 내게는 정리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주로 촬영과 관련된 현장의 상황, 조명의 설치 등에 대해 이야기할 작정이라 사진과 상관 없는 사람에게는 생뚱맞은 소리가 될 것도 같다.
2012년의 사진이다. 아마도 조명 두 개로 겨우 조명하던 시절이다. 인터뷰 촬영이었고, 모델은 나이가 제법 되는 여자라는 사전 정보만 가지고 갔다. 주어진 촬영 시간은 2시간 정도였다. 메이크업 시간을 빼면 실제 촬영 시간은 한 시간을 조금 넘는 수준일 것이다.
촬영은 가로 사진과 세로 사진을 모두 찍기로 했다. 그리고 사진 안에 텍스트가 들어갈 공간도 함께 넣기로 했다. 잡지 촬영의 경우 사진을 단독으로 쓰는 지, 또는 사진 위에 텍스트를 올릴 것인지에 따라 구도가 달라진다. 또 가로 사진의 경우 한 페이지에 넣을 지, 아니면 펼친 페이지 전체에 쓸 것인지에 따라서도 구도를 다르게 잡는다. 특히 풀페이지 사진의 경우 인물의 얼굴이 페이지 중간에 걸리는 불상사를 피하는 것이 절대 수칙이다. 그래서 풀페이지로 쓸 가능성이 있는 사진은 인물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도록 구도를 잡는다.
장소는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이었고, 식사 시간을 피해 일정을 잡았다. 레스토랑 층과 윗층의 프라이빗룸을 둘러보며 촬영 포인트 세 곳을 선정했다. 한 두 컷을 쓰는 인터뷰 사진의 경우에 나는 보통 세 곳 정도의 배경을 미리 골라둔다. 최대한 심플한 배경 한 곳, 배경에 디테일이 많은 곳 한 곳, 그리고 가장 안전한 배경 하나 정도를 더 고른다. 그렇게 해 두면 에디터나 잡지 아트디렉터에게 좀 더 다양한 선택지를 만들어 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한 곳에서 수 분 안에 촬영을 마쳐야 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상황이었지만 충분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서 자연광을 보조광 내지는 필라이트로만 쓰고 조명을 따로 하기로 했다. 현장에 도착한 모델은 연륜에서 나오는 힘이 있었다. 비주얼 관련 컨설팅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이미 많은 촬영 경험이 있어서 도착하자 마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옷이 가득 든 트렁크를 가지고 왔었다. 본인의 옷을 직접 준비해 오다. 보통 잡지 촬영은 에디터가 준비하지만 직접 가져오는 경우도 꽤나 된다. 남성은 본인의 옷으로 찍는 경우가 많고, 여성도 특히 비주얼 관련 종사자들은 직접 가져오는 경우도 많다. 무턱대고 내 옷을 입겠다는 고집이 아니라,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오랜 시간동안 고민한 결과이니까 에디터도 마음 편하게 동의한다.
한 시간 가까운 메이크업을 마치고 촬영을 시작했다. 우선 레스토랑 복도에 있는 그림 앞이 첫 포인트다. 그림은 높게 걸려서 아래 낮은 테이블을 두고 그 위에 올라서도록 했다. 상하이의 야경을 그린 그림인데 적당히 어두운 톤이어서 배경으로 쓸 만했다. 모델은 얼굴 윤곽이 깊은 편이어서 빛을 너무 측면으로 쓸 수 없었다. 정면에서 필라이트를 넣으면 모델 뒤에 있는 그림을 표현하기 어려울 듯해서 메인 조명 하나로 최대한 얼굴 전체를 비추도록 했다. 그리고 모델의 왼쪽 뒤에서 배경과 모델을 분리하는 라인 조명을 넣었다. 배경 그림에 하나의 라인을 만들면서 모델의 머리까지 닿는 빛을 위해서는 20도 정도의 그리드와 확산지를 덧댄 조명이 어울렸을 것 같은데, 아마 갖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없었다면 스누트를 썼을 것이다. 메인 조명은 흰색 우산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서서 테스트했을 때보다 모델의 얼굴은 더 깊었기 때문에 조명 위치를 조금씩 조정하면서 촬영했다.
이 사진을 찍은 후 레스토랑 중간 대기실에서 한 장을 더 찍고, 실내로 이동해서 둥근 지붕을 활용해 한 장 더 찍었다. 그리고 야외광을 최대한 활용해서 한 장을 더 추가하고, 개인 책자 출판 때 쓰고 싶다고 요청해서 그림을 배경으로 한 장 더 찍었다.
에디터는 최종적으로 대기실에서 촬영한 컷을 사용했다.
촬영. 120430 @Indigo hotel Shangahi, CHINA
Client. Tatler Shanghai magazine
2014.05.08 09:10
새 명함이 나왔다. 영어 이름을 바꿨다. 새 영어 이름은 MoBe모비라고 지었다. 중국에 와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영어 이름을 썼는데, 당장 써야 하니 급하게 아무렇게나 고른 이름은 Mark였다. 10년쯤 되었다. 지금 대부분 친구들이나 거래처 사람들은 나를 Mark라고 부른다. 오래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벼르던 차에 새 이름으로 바꾸고 새 명함을 받았다.
이름이 바뀌면 많은 것이 따라 변할 것이다. 예전에 이름을 바꾼 친구가 있었는데, 오래 알아온 친구가 아니었는데도 새 이름을 부르니 내가 그동안 알던 사람은 어디로 가 버리고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내가 아는 사람인데도 모르는 사람을 부르는 것 같아서 어색했다. 지금은 그 친구 옛 이름은 잊었는데, 어쩐지 그 친구를 잘 찾지 않게 되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종합이다. 사진 작업을 구상하며 그 사람 위에 덧대어진 것들을 모두 지워보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우선 지워질 수 있는 것은 직업이었다. 나이를 지울 수 있었고, 관계를 지울 수 있었다. 옷을 지울 수 있었고 화장을 지울 수 있었다. 그리고 거의 끝까지 남는 것은 이름이었다. 이름은 이미 사람의 얼굴과 분리하기 어려웠다. 내게는 그랬다. 그 사람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불린 이름이다. 이름 글자 안에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담아서 지금의 그 사람이 되었겠다 싶었다. 이름은 무거운 것이다. 어떤 약속의 담보로 내걸 수 있는 가장 무거운 것 중에 하나가 아마 이름 석 자의 무게이지 않을까 싶다. 이름 앞에 부끄럽기 싫다.
한 동안 사람들은 나를 옛이름으로 부르겠지만, 이제부터 새로 알게 되는 사람들에게 나는 MoBe입니다. 소개할 테다. 뜻과 발음은 소설 모비딕Moby Dick에서 땄다. by비보다 Be가 낫겠다 싶어서 MoBe라고 쓰기로 한다.
2014.04.22 18:49
또 지난 사진들을 봤다. 컴퓨터를 새로 샀고, 사진 데이터를 새로 옮겼다. 지난 사진들을 어쩔까 하다가 남겨두었다. 그냥 보관만 하는 게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지난 사진들과 그 이야기를 좀 써볼까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을 열었다가 제법 지웠다. 사람 사진을 많이 지웠다. 그들이 아직도 내 컴퓨터 안에 자기들 사진이 남아 있다는 걸 알면, 젖살도 안 빠지고 여드름도 가시지 않은 얼굴이 바다 건너에 남아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불쾌하겠는가. 이제 나에게 잊혀지는 것이 맞지 않겠나.
사진은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한다. 내가 가진 사진은 2004년부터다. 처음 사진을 시작한 게 2002년, 군대를 다녀온 후였으니까 첫 두어 해 빼고는 모두 있는 셈이다. 제법 날려먹기도 하고, 지우기도 했지만 여전히 많이 있다. 그때, 나는 사진을 참 못 찍었구나. 의미없는 셔터를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다녔구나. 내가 사진으로 밥벌어 먹는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 적어도 한 가지 의미는 확실하니까 말이다.
지난 사진을 꺼내고,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보려고 한다. 아마 상업사진에 대한 부분이 많을 것이다. 개인 사진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울 만큼 못 났다. 이렇게라도, 사진을 꺼내보려고 한다.
사진은 05년 2월에 찍었다고 적혀 있다. 사진을 배우러 다니던 곳이 대학로에 있었는데, 길 건너편으로 비탈진 언덕에 집들은 쌓여 있었고, 좁고 구불구불한 계단을 따라 꼭대기까지 가면 위태로운 시멘트 경사벽 위까지 갈 수 있었다. 항상 짖는 개가 한 마리 있었고, 무당집이 있었다. 거기서 뒤돌아보면 집들이 보였다.
2014.02.18 23:09
종이 한 장 찢어지는 소리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려다
어떤 대상을 잠시나마, 작게나마 위로하고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사진이고 글이면 좋겠다. 몇 년 사이, 기준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 번 무너지고 나니 사방에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안 보인다. 틀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고 이럴 수 있구나, 저럴 수 있구나 싶다. 힘이 실린 말을 들으면 그게 맞나 싶어서 따라가고, 좋은 사진을 보면 또 저게 맞구나 싶어서 따라간다. 그래서 내가 잘 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점점 모호해졌다. 뿌리 없이 흔들리는 들풀같은 날들이다. 이름도 없는 초라한 날들이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 마음이 급해져서 어디든 뿌리내리고 싶고 무엇이든 붙들고 싶어진다. 조바심이 난다. 다들 저만치 가는데 나는.
일정을 못 맞춘 내 책임이 가장 크겠는데, 이번 책도 미끄러졌다. 한국 출판사 쪽과 미팅도 하고 이번에는 뭐가 되나 싶었는데 중국 측에서 올 해 일정이 너무 많다고 한국어판 출판을 연기하자고 했다. 맞다. 내가 늑장부리지 않았다면 작년에 나왔어야 할 책이니까 올해 일정에 반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쉽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마음껏 아쉬워하지 못 했다. 고등학교 때 낸 신춘문예 원고는 납으로 만든 추처럼 소리도 없이 가라앉아서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중국에 와서 두어 해 동안 쓰고 다음었던 상하이 에세이는 출판사 몇 곳의 정중하고 단호한 거절에 멍들고 죽었다. 중국 몇 지역의 관광부서 의뢰로 만든 책은 동네 인쇄소 안내책 수준으로 멎었다. 그리고 이번 책은 중문판만 우선 나올 모양이다. 그래도, 이렇게 몇 권을 더 쓰면 서점에 내 책을 까는 날이 온다는 확신이 생겼다.
투정하는 문장은 실체가 없는 글이다. 좋은 글은 오래 묵은 생각과 단단한 정보로 쌓은 구조물이다. 그러니까 개인의 감상만으로 이어진 문장은 신기루에 그친다. 그런 문장이 많고 또 많이 읽히는 세상은 속이 빈 세상이기 쉽다. 그러니까 글 쓰는 사람은 가능한 그런 문장을 쓰면 안 된다. 그래도,
종이 한 장 찢어지는 소리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려다 소심한 마음이 들킬까 봐 얼른 제자리에 불러 앉히는 마음이 있잖은가. 매일을 버티는 심정으로 날마다 잇대어 사는 사람도 많잖은가. 어떤 날의 나처럼.
그러니까, 세상에 많을 테니까, 작은 위로라도 건넬 수 있다면, 나도 작은 소용이라도 있는 사람이지 않겠는가.
이 애달픈 세상에서.
2014.02.03 20:23
어쩌다가 지난 메일을 읽었다. 오래된 것들이다. 메일에서 사람들은 나를 섬.이라고 불렀다. 섬, 참 좋은 이름이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 섬.이 있고, 장 그르니예의 책 중에 섬.이 있다. 나는 섬.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아마 2009년을 전후한 때에, 나는 섬.이라는 이름을 썼었나 보다. 잊고 있었다.
내 아이의 이름은 마루.다. 아내가 김훈의 수필에서 따 온 이름이다. 나는 그 이름이 참 좋아서 마루.라고 마루를 부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둘째도 이미 이름을 정했다. 그 아이는 나루.라고 부를 것이다. 마루가 바깥과 안을 잇는, 지상의 소통하는 공간이니까 나루는 물과 뭍을 잇는 공간이 될 것이다. 마루와 나루가 사는 시대는 국경의 경계를 우습게 넘을 테니까, 일부러 영어 이름을 따로 짓지 않아도 되도록 발음하기 쉽게 했다.
아내 이름은 이승희.다. 나는 아내.라고 부른다. 직접 부를 때는 여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내 아내가요, 아내는요, 라고 시작한다. 아내는 후안 미로의 그림을 좋아하는데, 마침 미로의 그림에 있는 작가의 싸인과 아내의 장난스러운 싸인도 닮았다. 나는 아내의 새 영어 이름으로 미로.를 강력하게 밀고 있다. 아내의 반응은 시큰둥하지만.
내 이름 반치옥.은 발음하기 어려워서 별로 안 좋아한다. 할아버지께서 좋은 뜻으로 지으셨다는데, 어렵다. 그래도 워낙에나 독특해서 세상 천지가 다 검색되는 정보의 시대에서도 인터넷에 내 이름 쓰면 딱 나만 나온다. 영어 이름은 Mark인데 급하게 지어서 역시 많이 마음에 드는 이름은 아니다. 그런데 이미 그 이름으로 굳어서 다들 그렇게 부르니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이름을 바꾸게 되면, 새 영어 이름은 섬.이라고 해야겠다. 또는 비애.라고 하는 것도 좋겠다. 섬은 Sum이라고 쓰자니 산수 시간 같아서 안 되겠고, Some라고 쓰자니 이것도 아니다. 어떻게 쓰나? 비애.라는 단어는 발음이 좀 여성스러운가? Vie쯤 되나? 이건 뜻이 있는 단어일 텐데, 다른 글자 조합으로 비슷한 발음이 나도록 찾아봐야겠다. 비애,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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