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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3
스노클링
일 때문에 산을 올랐다. 전체 산행은 네 시간에 가까웠다. 땀이 비처럼 흘렀고 후반에는 진짜 비를 맞으며 올랐다. 땀과 비에 젖은 옷은 끔찍한 냄새가 났다. 일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곧장 스노클링 장비를 챙겨서 가까운 바다에 갔다. 깊은 바다는 무섭고 재밌었다. 이 여름이 다 갈 때까지는, 어쩌면 가을 한 동안에도 스노클링 장비를 항상 차에 넣어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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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바르고 선한 정치인이 또 한 명, 스스로 죽었다. 뵌 적 없지만 친근한 분이다. 며칠 동안 여러 생각이 오간다. 또 한 분에게 큰 빚을 졌다. 부채가 늘었다.
자녀가 부정입학했다는 sns 유언비어에 대해 해명하면서, 수배 생활과 정치 생활로 때를 놓쳐 아이가 없다고 말하는 에피소드를 말해주니 아내가 운다.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그 말이 와닿는 모양이다. 그의 죽음 때문에 밤에 잠을 잘 못 잔다는 지인은 사는 방향에 대해 다시 고민한다고 했다.
음,
그가 정의당에 남겼다는 유서를 보면서 그의 결정을 조금 짐작했다. 자식 대신 키워온 진보정치가 다시 외면받을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허물은 자신에게 묻고 계속 정의당을 지지해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들었다. 큰 빚을 졌으니까, 그의 마지막 부탁은 어떻게든 좀 기억하고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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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데, 정돈하는 버릇을 만들지 못 했다. 공간의 정돈보다 어려운 것은 생활의 정돈이다. 해야할 일은 언제나 난삽한데 당장 눈앞에 닥친 것들이 일의 순서를 결정한다. 때를 놓치는 일이 많고, 엉켜버리는 일이 부지기수고, 완성도에 미치지 못 하는 일이 또 제법 된다.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만 계속하고 있다. 다만 절박함은 한결같다. 남은 인생을 이렇게 무질서하게 계속 살 수는 없다. 될 때까지 정돈을 시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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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 꼬리를 문다
아침에 쓰려고 열었다가 몇 줄 메모만 하고 덮었던 페이지를 다시 열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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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눈 내린다. 다행스럽게도 길에 쌓였던 눈은 녹았는데 땅이 다시 언다.
지난 상하이 출장 동안에 픽사의 새 영화 코코를 봤다. 공각기동대 신극장판도 봤다. 두 영화는 다 재미있었고 만나는 지점도 있었다.
코코에서,
죽음 이후에도 삶은 이어진다고 말한다. 해골들의 이야기니까 마루한테 보여주기는 어렵겠다. 마루는 좀 무서워할 것 같다. 영화는, 사람은 죽은 후에 그 다음 세상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계속 살아간다고 이야기한다. 무대가 바뀔 뿐, 지구에서 살던 관계망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면서 진짜 죽음이란 더 이상 자신을 기억해 주는 존재가 없을 때라고 말한다. 그때에 이르면 존재는 무.로 돌아간다. 재미있고 유효한 발상이다.
공각기동대도 비슷하다. 오래 전에 봤던 아주 초기 버전의 공각기동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인간이란 결국 기억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사가 여전히 큰 인상으로 남아있다.
재미있는 것은, 독립된 개체로서의 존재다. 의식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개체로서 독립되어 있고 그 독립성 위에서 모든 성취를 이루고 또 평가받는다. 운동선수의 우수함이나 학자의 성취는 결국 그 개인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도 개체가 가지는 고립의 한계를 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우주의 역사에서 개체의 개념이 등장한 이후로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 경계가 만드는 고립은 극복 불가능하다. 그런데, 만약에 개체가 고립의 경계를 넘는다면 무슨 일이 생겨날까? 개체를 개체로 존재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고립의 경계는 과연 깨어질 수 있을까? 그게 깨진다면 개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최근 몇 년 AI의 눈부신 발전은 어쩌면 그게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최신의 공각기동대 신극장판은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세상의 지성이 모두 결합되는 시대.
재미있는 상상들이 꼬리를 문다.
작업실 근황 쓰려고 열었던 페이지였는데, 되지도 않는 아이디어만 적고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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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며칠째 폭설이다.
제주는 며칠째 폭설이다. 이런 겨울은 태어나서 처음 보낸다. 태어나고 자란 거제도나 계속 살았던 상하이 어디도 이런 겨울은 없었다. 제주도 이런 겨울은 처음이라는데, 그 처음을 제주 두 번째 겨울에 겪다 보니, 이 섬은 항상 이런가 싶다.
사진관 2층으로 짐을 옮긴 지 한 달 가까이 됐다. 작은 가스난로 하나를 켜고 작업하는데 손 안 시릴 정도는 된다. 어제 늦게까지 마무리해야 될 작업이 있어서 새벽 6시까지 작업실 컴퓨터 앞에 있다가 집에 와서 잠들었다. 내일 보내야 될 사진, 모레 보내야 될 사진이 차례로 줄 서 있다. 오늘 몸이 시원찮아서 어제 잠을 못 잔 탓인 줄 알았는데 저녁에 보니 열이 오른다. 감기가 올 모양이다.
오늘도 거의 새벽까지 작업해야 하니까 두툼하게 입고 작업실에 있을까 하다가 작업할 사진과 노트북을 챙겨서 집으로 건너 왔다. 보일러 배관이 지나는 샤워실 앞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포토샵을 연다. 큰 작업이야 내일 작업실 컴퓨터로 하더라도, 우선 오늘 밤에는 여기서 하면 되겠다.
저 뒤에 방에서 아내가 마루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아내가 읽어주면 마루가 질문하고 아내가 대답한다. 보지 않아도, 저 목소리만 해도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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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발휘하고 와요
"실력 발휘하고 와요."
아내가 말했다. 2주 내내 촬영이 이어진다.
상하이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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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HADAI 라는 옷이 있는데요,
OSHADAI라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중국 브랜드이고요. 매장은 상하이에만 있습니다. 작은 독립 브랜드죠. 주로 옷을 만들고, 주방이나 거실에 쓰는 패브릭 제품이나 소품을 만듭니다. 한글로는 오사다이. 중국어로 쓰면 哦沙袋입니다. 哦는 '오!'라는 감탄사가 되고요. 사다이沙袋는 모래주머니라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작은 모래주머니,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까, 오!모래주머니! 라는 브랜드입니다.
한 명의 디자이너가 모든 것을 디자인하고, 고향의 작은 공장에서 수공예로 제품을 만들어 냅니다. 디자이너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감을 수집하고,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패브릭을 구해 오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오사다이의 디자이너를 인터뷰하는 잡지의 에디터와 함께 포토 자격으로 갔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연락 받았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이 참 마음에 들었다고, 기존에 찍혔던 다른 많은 잡지의 사진과 달랐다고. 그러니까 자기 브랜드 화보 작업을 같이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입니다. 그 뒤로 우리는 1년에 두 번씩, 시즌 화보를 찍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는 이야기 나누는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시즌 촬영이 끝나면 보통 찜해 둔 외투를 아내에게 선물합니다. 물론 조금 할인은 받습니다. 소재가 무척 좋아서 입고 있으면 보기 좋습니다.
대규모 브랜드가 아니어서 작업의 자유도는 훨씬 큽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아이디어를 산처럼 쌓아댑니다. 그렇게 쌓인 생각의 산에서 한 삽씩 퍼내면서 꼭 찍어야할 사진, 꼭 필요한 느낌만 남깁니다. 물론 현장에서 찍다보면 어느새 생각도 못한 계곡도 생기고 숲도 생기는 건 어쩔 수 없고요.
나중에 한 마디 덧붙이더군요.
네 사진, 참 좋아.
그런데 그거 좋아할 사람, 많지 않을 걸?
칭찬인 지 욕인 지,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대충 맞는 말 같네요.
오사다이의 여러 사진에 대해 나중에 더 적을 일이 있겠지만, 우선 오늘 적는 것은 2017 S/S 시즌 작업입니다. 2016년 겨울에 찍었으니까 한참 전이네요. 보통 한 시즌에 20장 조금 넘는 사진을 씁니다. 찍은 사진들 중에 몇 번 걸러내고 나면 그래도 200여 장 넘게 남는데, 그 사진들을 모두 프린트해서 펼쳐놓고 같이 스토리를 짜면서 남길 사진과 순서를 결정해 갑니다. 보여줘야 되는 옷, 드러나야 되는 디테일이 있으니까 선택의 기준은 냉정하고 잔인합니다.
이번 시즌에는 유난히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었습니다. 찍어두고 보니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최종 인쇄 선택과 상관없이 별도의 스토리라인 하나를 적고 싶었습니다.
저기, 나 따로 사진 좀 추려서 블로그에 올려도 될까?
그럼, 물론이지.
그래서 골랐습니다. 물론 이 대화는 몇 달 전이었고요. 하하.
덧붙일 이야기는 없습니다.
다만, 사진가로서 이야기 하나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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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의 현장] 클라이머의 등근육 구경하세요.
안녕하세요. 모비입니다.
간밤에 이상하게 잠을 못 잤네요. 한밤중에 깨어서 잠시 뭔일인가 상황 파악을 하고, 곧 잠이 오겠지 생각하면서 두어 시간 뉴스를 보다가, 들어가서 다시 누웠는데 결국 잠은 안 오고, 내 이불을 아내와 마루에게 덮어주고 나오니 어느새 창 밖에 푸른 빛이 돕니다. 새벽 낚시라도 가 볼까 하다가 시간이 어중간하고, 안 되겠다 싶어 글이나 쓰려고 준비해둔 사진들을 엽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글 썼을 걸요.
[사진가의 현장] 세 번째군요.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실내 암장 사진입니다.
암벽은 개인적인 취미이기도 해서 오래도록 지켜봤습니다. 클라이머를 지켜보고 있으면, 동작은 마치 벽 위에서 춤추는 것처럼 아름답습니다. 비교적 낮은 3~4미터 높이의 벽에서 고난이도 동작을 구사하는 형태를 볼더링이라고 하는데요. 높이가 낮은 대신 하나하나의 동작(클라이밍에서는 무브라고 부릅니다.)이 클라이머의 한계를 시험하는 정도인데 힘과 균형을 모두 요구합니다. 손가락 하나 겨우 버티는 동작에서 발끝으로 체중을 지지하며 몸을 움직여 갈 때, 저것은 춤이구나. 싶습니다.
사진가의 마음이 어디 갈까요. 저거 저, 꼭 찍어봐야겠다. 벼르고 있었습니다. 상업사진을 직업으로 하면, 찍고 싶은 사진보다 찍어야 하는 사진이 월등하게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사진보다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사진이지요. 종일 촬영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면 카메라는 무겁기만 하고 다시 쳐다볼 힘도 없습니다. 없는 힘으로 다시 카메라를 드는 것은 결국 다음 클라이언트가 부를 때지요. 그러다 보면 상상하는 이미지를 만들 기회는 점점 줄어듭니다. 점점 소모되는 겁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욕심나는 프로젝트를 따로 만듭니다. 컨셉을 구상하고, 적당한 모델을 찾고, 부탁하고, 내 돈을 써서 준비하고, 촬영합니다. 개인작업은 우선 원하는 조명을 내 마음대로 써도 되고요. 결과물에 대해 평가받을 일도 없으니 마음 편하게, 놀이하듯 찍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한 번씩 이렇게 내 맘대로 찍어서 쓸 만한 사진 몇 장 만들고 나면, 아, 나 사진가구나.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상하이에 있을 때 자주 가는 암장 주인장과 제법 친해졌을 무렵입니다. 컨셉을 설명하고 제안했더니 당연하게 환영합니다. 설명했다고는 했지만 아직 세상에 없는 사진을 만들 텐데 그게 말로 제대로 설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상상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서 보여주면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그 감탄의 예상까지 즐거운 게 개인작업이지요. 난장판을 벌여놓고 엄마의 등장을 기다리는 마루의 심정이 그럴 겁니다.
Part 1.
이 암장은 쇼핑몰 꼭대기층에 있어서 위쪽으로 자연광이 들어옵니다. 의도한 사진은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야 되니까, 늦은 오후쯤 도착해서 장비를 준비하며 해가 지기를 기다립니다.
조명은 두 개를 씁니다. 하나는 길쭉한 소프트박스를 장착해서 암벽 위에 올렸습니다. 이 조명이 근육의 질감을 최대한 강조해서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왼쪽에 있는 조명은 탑조명 하나만 썼을 때 생길 단조로움과 암부의 위험으로부터 사진을 구할 겁니다. 위에 있는 조명에는 푸른색 젤을 쓰고, 왼쪽에 있는 조명은 좀 더 푸른색 젤을 씁니다. 서로 다른 색의 젤을 쓰는 이유는 지난 번 글에서 설명드린 적이 있는데, 색의 깊이는 더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주제는 클라이머의 등입니다. 클라이밍은 온 몸의 근육을 쓰는데, 오래 운동한 클라이머들의 등근육은 특히 탐스럽습니다. 여러 동작 중에서도 특히 등근육을 최대한 긴장시킨 포즈를 같이 연구합니다. 조명도 물론입니다. 만약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밋밋하다면 근육의 질감을 묻어버릴 겁니다. 가로로 긴 형태는 클라이머의 다양한 동작에 대응해서 클라이머가 어디로 움직여도 빛이 닿을 수 있도록 하고, 앞뒤로 좁은 형태는 내가 원하는 클라이머의 등에만 수직으로 빛이 떨어지도록 돕습니다. 다른 곳까지 너무 밝아버리면 사진을 보는 시선이 산만해 질거니까요.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옆에서 들어오는 조명도 빛을 끊어내는 반도어를 장착해서 최대한 좁은 범위로, 원하는 부분만 빛이 닿도록 합니다.
조금씩 조명과 포즈, 카메라의 세팅을 수정하며 준비가 완료됩니다. 자, 쇼타임! 무심한 듯했지만, 오늘 머리 새로 하고 온 암장 마스터입니다. 옷 입고 있을 때는 좀 마른듯 보이지만 벗겨보면 군더더기 없는 몸. 딱 필요한 근육만 남겼습니다.
암장의 신흥 주력입니다. 처음 암장 오픈할 무렵에는 암장 스탭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도 했는데 몇 년 사이 성실하게 운동한 표가 납니다. 평소 행동은 참 겸손한데 몸은 전혀 겸손하지 않네요.
암벽 동작 중에 다이노라고 부르는 동작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으로 가는 동작입니다. 점프죠. 조명 위치와 홀드 거리를 체크한 후 손 보다 더 높은 곳에 목표지점을 정합니다. 하나, 둘, 셋. 날아요! 마스터! 왼쪽을 비추던 포인트 조명은 이때 오른쪽으로 옮겨왔습니다. 아래쪽으로 그림자를 만드는 등근육의 조명은 위에서, 척추 홈에 그림자를 만드는 조명은 오른쪽에서 오고 있습니다.
촬영 위치를 바꿔서 탑조명이 있던 위치까지 올라갑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촬영하고, 모델에게 겨우 잡을 만큼 높은 곳에 있는 홀드를 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상상하던 이미지하고는 조금 다르게 나오더군요. 이걸 제대로 수정하려면 조명 위치부터 시작해서 바꿔야 할 게 참 많아 보입니다. 아쉽지만 이 정도로 찍고 오늘은 마무리합니다.
Part 2.
두 번째 촬영을 진행합니다. 한 번 더 찍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 여성 클라이머를 꼭 찍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촬영 때 남성 여성 클라이머를 모두 찍겠다고 마스터에게 말해두었는데 마스터는 아무래도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던 모양입니다. 마침 마음에 드는 친구가 있어서 부탁하고 한 번 더 날을 잡았습니다. 탱크탑 상의에 청바지를 입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모델은 몸풀기 중.
라이팅으로 없는 근육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조금 있는 근육을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가능합니다. 첫 번째 촬영과 같은 세팅으로 촬영합니다. 가능한 팔을 멀리까지 뻗은 후 체중을 실으면 어깨와 등근육이 도드라집니다.
예쁘장하게 포즈만 잡는 친구는 아닙니다. 실제 아마추어 대회에도 나가는 열혈 클라이머입니다.
예정에 없던 컷입니다. 연속으로 이어진 어려운 동작을 마치고 다음 촬영을 진행하기 전, 벽에 기대어 쉬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철수하려던 조명을 잠시 멈추고 얼른 찍어둡니다.
이번엔 기울기 각도가 더 큰, 상대적으로 복근을 더 많이 써야하는 벽 앞에 세웠습니다. 조명은 거의 같은 형태로 씁니다. 역시 머리 위에 하나를 설치하고, 측면에서 하나를 더 씁니다.
몸풀기를 주문하고 모델의 동작을 살피면서 어떤 자세가 가장 어울릴까를 생각합니다. 이 컷은 얼굴은 예쁘게 나오는데 전체적인 선이 어지러워서 탈락한 B컷입니다.
이 벽에서 나온 A컷입니다. 시원스럽게 화면을 나누는 몸선, 잘 드러난 복근, 공중에 매달린 자세인데도 나른하게 늘어진 몸, 살짝 드러난 눈빛도 마음에 듭니다. 힘겹게 버티는 게 아니라 벽 위에서 유영하는 저 느낌이 좋습니다. 왼팔이 조금 더 보였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긴 합니다. 화면 왼쪽 바깥에서 들어온 조명이 하이라이트 조명입니다. 배경에 수직으로 걸린 등반로프는 지금 모델이 매달린 벽의 각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줍니다. 본래 아래 바닥이 조금 보이는 컷인데 후반 작업에서 바닥을 지워내고 이미지를 완성합니다.
마지막 세팅입니다. 양쪽에 푸른색과 더 푸른색 조명을 준비합니다. 본래 의도대로라면 완전히 검은 배경이 나와야 하는데, 현장 이 생각보다 넓지 않아서 조명이 뒷배경에 닿습니다. 이게 클라이언트가 있는 상업촬영이라면 어떻게든 장비를 동원에 빛을 끊어내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같이 놀아보자고 진행하는 촬영이니 현장에서 수습 가능한 수준으로 진행합니다. 저, 주문 받아서 찍을 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하.
이 사진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은 외줄 로프입니다. 현장에서 해결하지 못 한 부분들을 후작업으로 덮었더니 효과가 과해보이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구경하던 마스터도 이 벽에서 한 장 남깁니다. 설렁설렁하는 것 같아도, 벽에 있을 때 저 사람 표정은 언제나 진지합니다. 안 시켰는데도 가능한 어려운 홀드를 잡고 고난이도 자세를 만들어 내는 당신은, 이 시대의 진정한 참 모델인입니다! 아, 아래 바닥 보이시나요? 저 바닥을 여자 클라이머 사진에서는 지워냈던 겁니다.
Part 3.
개인작업한 사진들을 중국 SNS에 공유했습니다. 중국은 웨이신微信, 영어로 위챗이라는 SNS를 가장 많이 씁니다. 카카오스토리처럼 개인의 이야기를 적는 것도 같습니다. 모델들도 자기 사진을 많이 좋아해서 자신의 계정에 모두 올려댔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 프랑스 인공암벽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난징에 인공암벽 공사가 있는데 촬영을 의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순환. 좋습니다. 재미있고 싶어서 진행한 개인작업이 누군가의 눈에 들고 그게 상업촬영으로 연결됩니다. 시간낭비, 돈낭비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괜히 혼자 흐뭇합니다.
난징 현장에 도착해 보니 아직 공사가 한창인데, 여기 오너는 이 암벽에 홀드를 박아넣기 전 모습을 찍어두고 싶었답니다. 태국에서 온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막 그림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찍을까 생각하다가 작은 조각사진들의 조합으로 진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현장 실무자와 상의합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클라이언트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소용 없습니다. 촬영자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기존의 이미지와 다른 신선한 한 장을 만들고 싶지만,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대상을 홍보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이미지를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는 최대한 의견을 낼 수 있지만 최종 결정은 클라이언트의 몫이고 사진가는 그 부분을 존중해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1.조각 이미지의 합성 느낌으로 간다. 2. 푸른색 색감을 부분적으로 더해서 찍는다.는 두 가지 의견 모두 받아들여졌습니다. 인공암벽은 수십 조각의 면을 조금씩 각을 비틀어 가며 붙인 형태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다이나믹한 면의 조합을 잘 살려낼 수 있을 지, 동시에 그래피티를 잘 표현할 지가 숙제입니다.
촬영하기로 했던 첫 날은 한참 공사중이라 도저히 촬영을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아쉽지만 대충 각도만 확인하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습니다.
푸른색 조명을 쓰겠다고 말했지만, 주제와 배경의 밝기 차이를 어느 정도 둘 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습니다. 클라이언트는 가능한 배경도 밝기를 바랬습니다. 그에 따라 세팅을 조절합니다.
작업 중인 그래피티 작가 아미지를 촬영합니다. 우선 왼쪽에 조명 하나를 넣어서 다양한 각도로 조합된 벽면의 선이 잘 드러나도록 합니다.
그리고 작업대 위에 조명 하나를 올려서 작가 상반신에 떨어지는 빛을 하나 더 준비합니다. 저 빛이 너무 넓게 퍼지면 안 되니까 앞에 반도어를 달아서 빛의 범위를 제한합니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컷이 완성됩니다.
바닥을 정리한 후 기념사진 한 장 남기자고 작가를 벽 앞에 세웠습니다. 그래피티 작가인 동시에 클라이머이기도 한 모델은 클라이밍장비 브랜드인 블랙다이아몬드의 후원을 받고 있답니다. 로고가 꼭 나와야 된다며 후원사의 외투로 갈아입었습니다.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한 최종 이미지 중 메인컷입니다. 벽면의 입체감이 잘 살도록, 그러나 너무 넘치지 않도록 사진을 더하고 빼면서 최종 이미지를 만듭니다. 클라이밍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드러나도록 사진의 바깥 테두리는 울퉁불퉁하게 남겼습니다.
다양한 입면을 볼 수 있는 디테일 컷도 필요합니다.
배경에 조명 하나, 모델의 오른쪽에 조명 하나를 두고 찍은 포트레이트입니다. 거대한 벽을 함께 볼 수 있도록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촬영합니다.
촬영이 끝난 벽에 프랑스 스탭이 홀드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홀드가 다 준비되고 사람들이 클라이밍을 시작하면 저 벽은 금방 때가 묻을 겁니다. 온전한 벽을 촬영해 두려는 클라이언트의 뜻을 이해할 법도 합니다.
암벽 촬영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생각해 둔 컨셉이 두엇 더 있기는 한데 당장 갈증은 풀었으니 아마 다시 암벽을 찍는다면 한참 지난 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다음에는 인물사진과 함께 제 주 촬영대상인 인테리어 촬영 이야기를 적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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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의 현장] 그룹사진을 찍을 때 고민할 것들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그룹사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네, 여러 사람을 한 장에 찍는 그 사진입니다. 인물을 찍는다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겠지만, 그룹사진은 개인 포트레이트와는 또 다른 분야입니다.
포트레이트는 주로 한 명을 찍지요. 한 명의 모델에게 질문을 거듭하면서 그 사람에게 있을 것 같지만 발견되지 않았을 표정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집중하기에 좋고, 1대1의 구도로 모델과 겨루는 그 순간의 느낌도 제법 즐길 만합니다.
하지만 그룹사진은 여럿이 대상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표정이 아니라 군집의 표정입니다. 군집의 표정은 개인 표정의 총합이 아니고, 새로운 하나의 표정일 겁니다. 사진 속의 개개인은 모두 웃고 있어도 군집의 표정은 무겁게 가져갈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한 겁니다. 가족이라면 화목함을 강조할 수 있겠고, 스타트업 기업이라면 젊은 에너지를 연출할 수도 있겠지요. 일반적인 기업 사진에서는 당당함과 편안함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기업으로서의 도전정신, 모험정신을 보여주어야 하고, 동시에 부드러운 기업문화를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적게는 대여섯, 많게는 백 명 단위의 사진에서 사람들의 개별 표정을 통제하기는 어렵고, 하나의 순간에 모든 사람의 얼굴을 최고의 표정으로 묶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룹사진이라고 해도, 그 규모에 따라 촬영 방식을 다르게 해야 합니다.
우선 규모가 큰 단체사진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안전하게 가는 게 상책인 것 같습니다. 백 명 단위의 단체사진에서 온갖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지만, 실패하고 수습하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많습니다. 우선 인원이 많으니 통제가 어렵고, 포즈 하나 바꾸거나 위치를 조금만 옮기고 싶어도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그리고 모델들이 조금씩 귀찮아하고 지루해하기 시작하면 그날 게임은 답도 안 나오는 겁니다.
보통 대형 단체사진의 경우 사전답사를 통해 미리 위치를 선정하고, 의자 등 필요한 소품을 준비시키고, 조명을 어떻게 쓸지 계산하고 필요한 전력을 끌어오는 것까지 사전단계로 진행합니다. 그리고 촬영 당일에는 최대한 신속하게 촬영을 진행시켜야 합니다. 전체 분위기가 지루해지기 전에, 다들 괜찮은 기분일 때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가까이에서 광각렌즈로 찍는 것 보다는 가능하면 거리를 확보해서 표준 렌즈로 촬영하는 것이 더 안정적인 느낌을 만듭니다. 사다리를 써서 높은 곳에서 촬영하는 것도 쉽고 강력한 방법 중에 하나이고요. 아예 건물 위에 올라가서 찍기도 합니다.
인물사진이란 그 인물의 특별한 인상이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작업입니다. 그 순간에 사진가의 인상까지 보태서 최종적인 이미지를 만들지요. 그래서 저는 촬영 때 가능하면 모델을 가만히 두는 편입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면서 그 모델이 제가 생각하지 못 했던, 또는 상상했으나 구체적으로 떠올리지 못 했던 표정을 만들어 내 줄 때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대형 그룹사진에서 이런 접근법은 쉽지 않습니다. 촬영 초기에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만 안 되더군요. 그래서 대형 그룹사진에서는 저도,
"김치~!"
이런 거 합니다. 그리고 퇴근하고 밥먹으러 가는 이야기하면서 다들 웃기를 기다리거나 그럽니다.
건물 지하에 있는 공간을 촬영 장소로 결정했습니다. 의자를 하나씩 놓아가며 스탭들을 앉혀서 구도를 짜 봅니다.
기본 조명을 맞추고, 모델들을 차례로 맞춰 봅니다.
촬영 후에는 가능하면 비어있는 공간을 한 장 더 찍어두는 게 좋습니다. 후반 포토샵 작업에 유용하게 쓸 수 있거든요.
현장 조명이 노란 색이니까, 역시 조명 앞에 노란색 젤을 붙여서 조명 색이 잘 어울리도록 합니다.
대형 그룹사진이 직업사진가로서 어쩔 수 없이 찍어야 하는 사진이라면, 그보다 규모가 좀 작은, 10명 내외의 그룹사진은 한 번 놀아볼 만한 작업입니다. 화면을 짜고 모델들을 요리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서두가 길었지만, 사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주제는 이 정도 규모의 사진입니다.
이 규모의 그룹사진을 찍을 때 제가 가장 중요하게 고민하는 것은 화면의 구도를 짜는 일입니다. 모든 인물을 하나의 선상에 세우거나 V자 형태로 배치하는 그런 사진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자연스럽게 흩어진 듯 모인 듯 배치하되 그 안에서 리듬감이 있어야 합니다. 낮고 높고, 앞서고 뒷서고, 크고 작고, 밝고 어두운 것이 모두 조화로워야 합니다. 이 작업은 어렵지만 재미있기도 합니다. 우선 너무 산만하지 않은, 좋은 배경을 찾습니다. 의자는 몇 개를 놓을 지, 몇 명을 세울 지 간단하게 개념을 잡고, 현장 스탭들을 데리고 시험 촬영을 합니다. 모델을 지금부터 세워버리면 너무 오래 걸리니까요. 그런 다음에 조명을 세우고, 화면을 확인해서 대충 준비가 된 것 같으면 모델들을 불러들입니다.
인물들은 중요도에서부터 생김새, 몸집, 그 날의 의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려의 대상이 됩니다. 이 변수들을 조합해서 마침내 가장 그럴 듯한 배치를 찾아야 합니다. 촬영보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쓰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동안 모델 한 명 한 명과 눈맞추고 위치나 포즈를 이야기하면서 관계를 만듭니다.
모델의 위치를 수정하는 과정과 동시에 조명 세팅도 체크합니다. 단체사진에서는 가능한 모든 인물에게 고른 빛이 들어오도록 합니다. 현장 조명이 오로지 자연광 뿐이라면 문제 없습니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대체로 동일한 빛이 떨어지니까요. 다만 이때는 배경도 역시 동일한 빛을 받아서, 인물을 강조하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요. 그래서 자연광에서 단체사진을 찍을 때는 자연광을 주로 쓰고, 약간의 하이라이트 조명을 보태서 입체감을 드러내는 방법을 주로 씁니다.
우선 현장에서 스탭을 세워 대충의 느낌을 파악합니다.
조명과 소품이 자리를 잡고요.
지난한 수정 과정을 거치면서 모델의 최종 위치, 조명의 최종 광량을 결정합니다.
자, 준비됐나요?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실내 인물사진에서는 보통 대형 사이즈 소프트박스나 엄브랠러 등을 써서 여러 사람에게 비슷한 정도의 빛이 떨어지도록 합니다. 스냅 촬영일 경우 천장 바운스 조명을 쓸 때도 있지만, 이 경우 빛은 약간 심심한 인상이 있어서 제대로 세팅해서 찍는 사진의 경우 저는 바운스 형태의 조명은 잘 쓰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대형 소프트박스를 양쪽에 배치하고, 필요에 따라 광량을 조절하면서 대비를 만드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배경을 함께 밝혀야 할 경우에는 반투명 엄브랠러를 쓰면 좋습니다. 인물들 주변의 배경을 최대한 살릴 지, 아니면 누를 지, 자연광을 살려서 찍을 지, 아니면 인공광으로만 찍을 지에 따라 광량과 조명 악세사리를 선택합니다. 광량 선택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조리개값입니다. 그룹사진이니까 여러 사람이 앞뒤로 설 경우가 많고, 지나친 개방조리개는 앞 사람만 선명하고 뒷사람은 흐린 참사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체 인물들을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심도를 확보해야 하고, 그만큼의 광량을 준비해야 합니다.
야간조명이 켜진 상하이 와이탄이 배경입니다. 몇 시간 전부터 와서 미리 위치와 각도를 살피고 조명을 준비합니다. 비가 내려서 조명에는 급하게 구해온 쓰레기봉투를 씌웠습니다.
우선 스탭들을 세워서 대충의 느낌을 파악합니다. 그런데 왜 건너편 빌딩들은 불을 안 켤까요? 마음이 불안하기 시작합니다.
다행스럽게 건너편 건물들은 조명을 밝혔습니다. 이제 다양한 분위기를 만들며 좋은 표정을 잡아내는 것만 남았습니다.
좋아요. 부어요. 마셔요.를 외칩니다. 에디터의 OK 사인은 아직 안 나왔습니다.
아마 최종 컷이었습니다. 최대한 카페 현장 조명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오른쪽 왼쪽 조명에 각각 노란색, 파란색 젤을 붙였습니다.
꼭 모든 인물을 동시에 조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요. 경우에 따라서는 두 세 명 단위로 끊어서 조명하기도 합니다.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한 후, 조명을 들고 이동하면서 원하는 인물에 따로 조명한 후 포토샵에서 여러 사진을 합성합니다. 주로 컨트라스트가 강한 사진을 만들어야 될 경우 이 방법은 적은 개수의 조명으로 강력한 효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모델들이 제자리에 섰고, 조명 세팅도 다 됐습니다. 자, 이제 쇼타임입니다. 최대한 모델들과 소통하면서 개개인의 표정을 살피고, 나아가서 군집의 표정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물론, 이 경우도 필요하면 좋은 표정의 사진들을 모아서 합성하는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지요. 없는 표정을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있는 표정을 조합할 수는 있으니까요. 저는 그렇게 작업합니다.
다음 번에는 실내 클라이밍 사진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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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의 현장] 노란색 와인을 만들어 주세요.
안녕하세요.
사진찍는 모비입니다. 이 게시판에는 촬영 현장 이야기를 올릴 작정입니다.
상업사진이 취미사진과 구분되는 큰 지점 중에 하나는 아무래도 조명의 활용일 겁니다.
그래서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조명 활용에 초점을 맞춰서 하나씩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사진들을 되돌아 보는 의미도 있을 테고요. 이 글을 읽으시는, 사진을 취미로 하시는 분들께는 조명에 대한, 그리고 촬영 전반에 대한 작은 힌트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첫 이야기는, 비교적 최근에 작업한 인물 사진입니다. 아, 제가 주로 찍는 분야는 인물사진과 건축사진입니다. 두 분야는 사실 많이 다른데요. 뭐, 그때마다 그에 맞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번 촬영의 클라이언트는 중국 와인 브랜드였습니다. 우선 촬영지까지 가는 것부터가 난관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클라이언트는 빠듯한 예산으로 촬영을 진행합니다. 촬영은 중국 우루무치 남쪽의 작은 도시에서 진행했습니다. 사실은 그곳에서 다시 한 시간 이상 차를 타야 하는 곳입니다. 대규모의 포도밭이 필요하니까 도시 근교로는 어려우니까요.
그럼 이때부터 몇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우선 예산 때문에 어시스턴트를 데려 갈 수가 없습니다. 혼자 비행기를 갈아타며 가야하니까 장비도 최소한으로 챙겨야 합니다. 기본적인 카메라 장비, 테더링 촬영과 데이터 백업에 필요한 노트북, 조명 두 개와 베터리 충전기 등, 4일 동안 필요한 옷가지 등 최소한으로 챙겨도 트렁크 네 개가 나옵니다. 자, 어쨌든 준비는 됐습니다.
비행기가 우루무치 남쪽, 티엔산 산맥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지방 도시의 작은 공항은 비행기에서 내리면 공항 건물까지 직접 걸어가야 합니다.
몇 장 안 되는 사진을 긴 시간 동안 작업하는 경우가 있고,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진을 작업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촬영은 후자였습니다. 회사의 전체 임원 사진을 다양한 형태로 찍어야 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자신과의 타협이겠지요. 모든 클라이언트가 완벽한 수준에 도달한 사진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원하는 쓰임에 부합하면 됩니다. 포토가 보기에 조명이 하나 부족해도, 각도가 조금 아쉬워도 그걸 하나하나 다 만져가며 작업할 수 없습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다음 컷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예정된 일정 안에 끝낼 수 없으니까요. 어디까지 고집을 부리고 어디서부터는 내려놓을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검은 배경천을 내려서 개인 프로필 작업을 우선 하루 동안 진행했습니다. 남자의 경우에는 조명 각도를 과감하게 써서 강한 인상을 만들었습니다. 여자의 경우에는 조명 두 개를 아래위로 써서 화사한 느낌으로 만듭니다. 남성을 조명하는 방식으로 여성을 조명하면, 상당한 경우에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렵습니다.
욕심을 냈던 와인저장고 촬영은 삼 일째에 진행했습니다. 지하저장고는 상상보다 더 거대했고, 추웠습니다. 그리고 전량 프랑스에서 수입하는 와인통에 어울리지 않게 낮은 색온도, 그러니까 푸른빛이 도는 조명이 공간 전체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우선 이 푸른빛을 해결해야 합니다.
프로포토 OCF 컬러젤입니다.
노란색과 더 노란색. 두 가지를 한 공간에 쓰면 색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조명 앞에 노란색 젤을 붙입니다. 이렇게 노란색으로 바꾼 조명을 강하게 쓰면 기존 실내 조명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저장고 전체에 노랗고 붉은 기운을 넣어서 고풍스러운 내부에 어울리는 색을 만드는 것이지요. 두 조명에 쓰는 젤은 같은 색으로 쓸 때도 있지만, 저는 노란색과 좀 더 노란색, 두 가지를 씁니다. 그러면 사진 전체가 하나의 컬러로 묶이지 않고 그 안에서 다른 층을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 조명 하나는 인물에 맞추고, 나머지 하나는 배경을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위치에 둡니다. 인물에만 맞추면 이토록 매력적인 환경을 하나도 보여줄 수 없으니까요.
자, 조명은 준비됐습니다. 이제 인물을 불러야죠.
이 와이너리의 맛을 책임지는 담당자입니다. 와인을 체크하는 여러 동작을 보여달라고 주문한 뒤 그 중에서 가장 사진적으로 어울리는 동작으로 결정합니다. 옷이 조금 마음에 안 들고, 허리를 좀 더 세우고 싶고, 배를 좀 더 넣고 싶지만 일정상 계속 붙들고 있을 수 없습니다.
저장고와 쇼룸을 돌아다니고, 저녁마다 와인으로 파티를 하며 4일의 일정을 마쳤습니다. 촬영은 4월 초였는데, 중국 신장 지역의 포도밭은 혹독한 겨울 동안 포도나무 줄기를 모두 땅 속에 묻어둡니다. 그리고 5월 즈음에 다시 줄기를 꺼내 지지대에 연결하면 올해의 포도가 시작되는 겁니다. 아쉽게도 잠시 둘러본 포도밭은 지지대 밖에 없는 황량한 흙바닥이었습니다. 포도덩굴은 볼 수 없었지만, 산맥 아래까지 끝간 데 없이 뻗은 그 규모는 상상의 경계 밖이었습니다. 신장은 올 때마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너무 작게 만들지만, 그 황량한 땅을 끝끝내 개척해내는 사람을 또 위대해 보이게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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