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고 서럽고 무력한 날이다.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 밖은 어두운데 멀리서 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진 빚을 못 갚았다. 새벽에 대선 결과를 확인하고 잠이 안 와서 컴퓨터를 켜고 밀린 작업을 한다. 밀린 일만 열심히 생각하면 조금 괜찮을까 싶어서. 안타깝고 서럽고 무력한 날이다.
마루도 곧잘 이재명 대통령 이야기를 했다. 이제 아이가 잠에서 깨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재명이라는 이름 뒤에 붙는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떼어줘야겠다. 열살 아이에게 어떻게 알려주어야 할까. 권력의 폭력과 비밀스러운 부정이 만연할 것인데, 약한 것들을 짓밟고 다른 것들을 비웃는 것이 당연해 보일 텐데. 아이에게 해줄 말을 한 마디씩 생각하다가 가슴이 막힌다. 왜 정의로워야 하는지, 왜 혐오와 조롱의 시대 속에 물들면 안 되는지 나는 잘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워왔던 사람들이 이렇게 패배하는 장면을 앞에 두고, 나는 마루를 잘 설득할 수 있을까.
웃는 눈이 닮았다.
부녀가 다녀갔다. 사진관의 프로그램은 1시간 동안 1명을 찍으니까, 두 개 일정을 예약해서 진행했다. 딸은 이번에 대학원을 졸업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아빠와 제주 여행을 왔다. 여행은 아빠가 제안했고, 사진관 촬영은 딸이 정해서 예약했다. 아빠에게, 딸이 가장 닮지 말았으면 하는 자신의 모습과 꼭 닮았으면 하는 모습은 무엇인지 물었다. 딸은 아빠가 이야기한 두 가지가 자신에게 모두 있다며 잠깐 울었다.
딸이 찍는 동안 아빠는 마을을 산책했다. 딸의 마지막 사진이 모니터에 떠 있을 때 아빠는 돌아와서 "포토샵이 너무 과하네." 웃으며 말했다. 원본인데. 뭐, 인생은 어차피 조명빨. 여러 조명을 비췄으니 그리 보였을까.
딸을 내보내고 아빠를 찍었다. 올해 쉰이 되는 아빠는 제주살이를 준비중인데, 이곳에서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그 준비가 시작되면 설랠 것 같다고 했다.
커플이나, 부모자식간이나, 친구사이가 함께 예약하면 각자의 사진과 함께 둘이 함께 있는 사진도 찍어준다. 서비스다. 아빠와 딸은 웃는 눈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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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지옥 같은 날들이다.
개미지옥 같은 날들이다. 일어나서 일하고 밥먹고 일하고 잠드는 일상들이 뒤엉켰다. 늦게 잠들고 새벽에 깨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데 잠은 덜 깨서 몽롱한 눈은 절반쯤 겨우 뜨고 그 정신으로 꾸역꾸역 하루를 모니터만 보면서 지낸다. 방전된 체력 때문에 오후는 버티기 힘들고 저녁 먹고 그 에너지로 겨우 정신 좀 차리고 일하다 보면 새벽이다. 책상에는 며칠 작업으로 온갖 것들이 쌓여서 손 하나 더 댈 틈이 없고, 바닥에는 쓰레기들이 널렸다. 스튜디오에 세팅해 둔 조명은 며칠 째 그대로이고 촬영 때문에 들고 왔던 돌멩이들도 주인처럼 작업실 바닥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두 달을 기다려 겨우 받은 카약은 물에 들어가 보지도 못 했다. 창고 한 구석에서 한 달이 가까워 온다.
우주의 끝을 보고 온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연말에 따져보니 2020년에는 책을 읽지 않았더라. 단 한 권도 안 읽었더라. 그래서 부랴부랴 올해는 책을 손이 들고 있기로 마음 먹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다. 오늘 마친 책은 시간에 대해 쓴 물리학자의 책이다. 별로 재밌지 않아서 제목은 안 적어야지. 작고 얇아서, 들고 다니면서 아무 때나 읽기 좋을 것 같아서 골랐다. 책 속에는 구입 영수증이 그대로 끼워져 있었는데 2019년 부산에서 산 책이고, 책갈피 끈이 책 중간쯤까지 가 있는 걸 보니 읽다가 말았던 모양이다. 시간을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했는데, 그러니까, 몇 개만 적어보면,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시간은 연속하지 않는다.
시간이 사라져도 사건이 남는다.
우리의 시간은 엔트로피의 증가 과정이다.
등등.
책의 저자는 훌륭한 물리학자라는데 훌륭한 해설자는 아닌 것 같다. 일반인이 교양서 개념으로 읽기에는 어려웠다. 단어는 알겠는데 문장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 많이 건너뛰며 읽고, 그럴듯한 문장만 골라 읽으며 이해되는 문장들만 연결해서 전체 이야기를 파악하려니 더 어려웠다. 반쯤 내려놓고, 대충 읽었다.
시간의 절대성이 허구일 수 있다는 말은 흥미로웠다. 영화 '컨텍트'에서 외계인들이 그들의 언어 속에서 시간은 일방적이지 않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책의 후반부로 가면 어설픈 철학자의 주장 같아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얼마 전에 읽은 책 평행우주.의 후반부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전개됐는데, 양자역학의 등장 이후 존재는 불확정.되고, 그 뿌연 가능성을 고정된 상태로 포착하는 것은 관찰자의 개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철학자와 시인들이 한참 전에 이야기한 '내가 너를 불렀을 때 꽃이 된' 이야기를 물리학자들이 하고 있는 사태인가 싶다. 숫자의 깔끔한 조합으로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마침표를 찍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물리학이 시를 쓰고 철학하려는 것인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 결론을 읽으려고 천문학 물리학 책을 찾아들지는 않았는데.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처럼, 읽는 동안 시간 참 안 갔다.
우리 우주를 관통하는 공통의 언어는 수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양자물리학이 관찰자의 개입이 확률의 모호함을 끝장낼 수 있다는 말을 읽고 나니까, 어쩌면 수학이 공통의 언어일 수는 있어도 유일한 언어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길을 통해 지금 최신 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형태를 꽤나 닮은 모습으로 그려낸 선배들이 있었다. 떠오르는 사람은 석가모니. 아인슈타인의 일화 중에, 그의 사후 최신 연구실에 초대된 미망인 이야기가 있다. 미망인에게 최신 연구장비를 소개하며 이 장비가 얻어낸 놀라운 실험결과를 말하자, 미망인은 '내 남편은 냅킨 뒷면에 대충 적어가며 그 결과를 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슷한 결과를 석가모니는 나무 아래 6년 동안 앉아서 생각만으로 얻어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그의 언어로 이미 우주의 끝을 보고 온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아내가 요며칠 '책 읽어주는 앱'을 테스트 중이다. 들어봐서 괜찮으면 마루에게 들려주려는 모양이다. 여러 미디어의 시대에, 책 읽기가 여전히 사람을 성장시키는 강력한 방법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읽어나가는 행위가 능동적이기 때문일까 싶다. 졸린 눈을 비비며 계속 읽고, 모르면 다시 읽고, 멈추어 생각하는 것은 적극적인 행동이니까. 여타의 미디어가 가만히 있어도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에 반해 독서는 직접 읽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메모처럼 휘갈겨 두고, 그만 써야지.
나는 직업사진가.
그럭저럭 사진으로 밥을 벌어먹고 산 것이 15년 정도 된다. 취미로 시작해서 열정의 단계도 있었고 절반쯤 발만 걸친 때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붙들고 있었던 때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15년. 이제 내가 상업사진가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내 사진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없고, 아마 계속 없을 것 같지만 붙들고 있었던 시간 만큼 알게 모르게 실력이라는 것도 쌓였다. 한 분야에서 고민하며 단련하며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갖게 되는 딱 그만큼의 실력이다. 더할 것도 없지만 덜할 것도 없는.
영상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니까, 영상 언어를 모르면 한 시대의 문맹이 될 것 같아서 얼마 전부터 영상을 연습하고 있다. 유튜브에는 기초부터 시작해서 온갖 고급 정보까지 다 있어서 하나씩 보며 따라하며 또 모르는 것을 찾아보면 더듬더듬 배워볼 만하다. 이러다가 영상으로 전업하나 싶다가도,
나는 직업사진가.라고 자각한다. 조금 더 나은 사진을 찍어야 해, 작년보다 올해 사진이 더 좋아야 돼, 할 수 있어, 혼잣말을 한다. 새로운 사진 스타일을 찾아보고, 리터칭 방법을 고민하고, 잠들기 전에 눈 감으면 새 컨셉을 생각한다. 잘 찍은 사진을 보면 괜히 샘나고 내 사진에 대한 갈증이 뒤따른다. 문제 앞에서 사진적인 해결방법을 떠올리게 되는 내가 반갑다. 영상의 언어를 배우지만 그 언어로 전하려는 내용은 사진에 대해서일 것 같다.
헤어와 메이크업, 스타일링을 작업해 줄 파트너가 있으면 좋겠지만 제주에서는, 게다가 이 외각에서는 쉽지 않다.
단 한 장의 사진에 시간과 물량을 투입해서 기가 막히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이해하는 클라이언트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도 어렵다.
손끝 하나까지 감정을 담고 카메라와 겨룰 수 있는 모델도 없다.
여러 한계가 있지만, 사진을 보는 사람은 카메라 너머 현장의 한계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 온라인의 시대에, 모든 직업사진가의 작업은 세계의 이미지와 경쟁하고 비교당한다. 그러니까, 숨을 수 있는 핑계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 확신은 생길 만큼의 시간을 고민하고 배우고 견디면서 왔다. 나는 직업사진가.
몸을 목적지로 삼아가는 사람들
춤을 직업으로 삼은 무용가 다섯 명과 이틀을 보냈다. 사는 일의 대부분에서 몸은 수단인 것 같은데, 그런 몸을 온전히 목적지로 삼아가는 사람들의 몸짓은 과연 그럴 만했다. 그 몸은 생존보다 실존에 가까워 보였다.
언어의 문법은 내가 가진 오래 되고 큰 궁금증 중에 하나다. 나는 문자언어의 문법과 다른 사진언어의 문법을 항상 고민하고 그런 문법이 잘 구현된 사진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우리 시대에 지배적인 언어는 디자인인 것 같아서 그 문법을 고민하고, 사진과 다른 영상언어의 문법을 배우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번 기회는 몸을 바탕으로 삼은 무용의 문법을 관찰했다. 대부분의 고급 언어가 그렇듯 그들의 문법을 배운 적 없는 내게 그들의 몸짓은 멀었다. 그들이 몸으로 쓰는 언어는 고급 응용의 수준에 있었는데, 나는 그 언어의 기초 구조 정도를 겨우 짐작하는 수준이니까.
예술의 여러 장르는 각자 그 장르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한다. 사진은 텍스트로 할 수 없는 말을 해야 하고 무용도 마땅히 그럴 것이어서 나는 궁금했다. 의식에서 단어나 이미지의 형태로 떠오른 주제가 몸짓의 문법으로 옮겨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를 물었다.
춤추는 그들의 몸을 본 후, 수첩에 적어둔 내 질문이 참 비루해보였다. 줄글로 겨우 적는 문자의 질문 한참 너머에서 그들은 춤추는 것 같았다. 이미 한참 전에 그들이 벗어버린 문자의 외투를 붙들고 그들의 언어를 눈대중으로 재어보려 덤빈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이번 작업에 나는 영상팀으로 참가했다. 카메라를 들고는 있었지만 사진을 찍지 않고 비디오 모드로 작업했다. 뭘 믿고 내게 영상을 의뢰하나 싶었지만, 영상을 맡은 경험 많은 스탭이 나 말고도 둘이나 더 있고, 사진은 또 다른 실력자가 맡고 있었다. 결과물 걱정 말고 마음대로 작업해 보라는 말에 기대서 수락했다.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으로 뷰파인더에 눈을 고정하고 영상을 찍었다. 이틀동안 빛도 좋았고 공간도, 모델도 빠질 것이 없었다. 핑계 대고 피할 곳이 없어졌다. 못 만들면 모두 내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