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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벽에 잠이 안 오니까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이유로 한 동안 제주 녹색당 당사에 다닐 일이 있었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그곳 벽에는 지난 지방선거 때 제주도시사 후보로 나왔던 녹색당 후보의 선거공약을 적은 내용이 아직도 남아있다.


미래비전- 국제자유도시 명칭을 폐기하고 생태환경특별자치도를 선포한다.

기본권 - 전도민 기본소득을 실시한다.

자치 - 읍면동장 직선제로 기초자치를 부활시킨다.

환경 - 관광객 환경부담금 3만원을 부과한다.

평화 - 강정 해군기지를 철수하고 탈핵평화조례를 제정한다.

민생 - 무상 공영버스를 도입하고 보행자 중심 교통도시를 선언한다.

노동 - 외주화 없는 제주를 만들고 비정규직 제로를 달성한다.

농업 - 농산물 최저가격 보장제를 실시하고 Non GMO 선언한다.

여성 - 낙태죄를 폐지한다.


몇 번 가면서 꼼꼼히 볼 기회가 없었는데 어제는 잠시 쉬는 동안 하나하나 읽었다. 아, 예쁜 생각들이다. 이대로만 되면 이 섬 참 좋겠다. 상황으로 따져보아서 어려운 것도 있고, 받아들여지기에는 저항이 많은 것도 있지만, 이런 상상과 기백, 참 좋아보인다. 


갈 수 없는 길이라고 포기하지 않고, 가야하는 길이라면 어떻게든 걸어보자던 역사의 선배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 여기까지 와서 살고 있다. 


제주에 들어와있는 예멘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활동을 지난 몇 달간 했다. 시작은 내 집 근처에 예멘인들이 들어왔다는 뉴스와 그 뉴스에 덧붙는 나쁜 댓글 때문이었다. 물어물어 연락해서,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물었더니 한국어 봉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어서 일상처럼 보여주는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그들의 얼굴이 노출될 경우 한국보다 예멘에서 그들이나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해서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겨우 몇 달이었지만, 여러 사람이 헌신적으로 그 낯선 외국인들을 돕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한국어 교육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지만 더듬더듬하며 함께 배우고 익혔다. 거리가 멀어서, 먹고 사는 일이 시급해서 나는 여기까지 하고 멈춘다.


이 새벽에 잠이 안 오니까 또 이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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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데 없는 것을 적는다

한 해, 버티느라 애썼다.

12월에 되면서 아내와 서로 대견하다는 듯 말한다. 경제적으로 쉽지 않은 한 해였다. 한 달 한 달 대출 이자와 카드 대금 대기가 빠듯했다. 은행의 독촉은 참 부지런하고 한결같았다. 한 해 시달린 마음의 대부분은 금전적인 것이었다.

내년에는 더 재밌을 거야. 잘 될 거야.

계획하고 있는 이런 저런 아이템들을 가지고 아내와 서로 응원한다. 할 수 없는 것에 너무 마음을 낭비하지 않기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금전적인 부분이 당장 어떻게 한 방에 해결되지는 않을 테니까, 거기에 너무 시달리지 말자고 다짐한다. 해 볼 수 있는, 하고 싶은 일은 내년에도 많이 있으니까, 부지런히 재미있자고 마음 먹는다.

뭐든 적으려고 보니 쓸 데 없는 것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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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접점이 여럿이면 좋겠다

관이 주최하는 토크콘서트에 다녀왔다. 좀처럼 갈 일이 없는데 관심 있는 인물이 주최한다고 하고 믿고 따르는 분이 가보라고 해서 갔다.

언어의 차이를 알았다. 같은 말 안에서 사람마다 손 안에 넣어 쓰는 단어가 조금 달랐는데, 마치 다른 언어 같았다. 관이라는 것은 구체적이고 단단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했다. 그리고 그런 언어를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조직에 소속된 게 별로 없는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의 사람들은 조금 다른 언어를 쓴다. 그 언어는 끝간 데를 모르고 시작과 마침에 거칠 것도 없다.

나이 들수록 쓸 수 있는 단어가 줄어간다던, 겨우 한 줌의 단어로 쓴다던 김훈의 말을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점점 줄어간다는 아쉬움보다 이 한줌의 단어를 마침내 완벽하게 구현한다는 확신이 어쩌면 더 크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의 단어, 나의 언어가 점점 확고해 진다. 나는 나의 말을 한다. 당신은 당신의 말을 하라. 그 사이에 접점이 여럿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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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유적지, 강태영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항몽유적지가 있다. 몽골의 고려 침략에 맞서 싸운 삼별초가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곳이다. 흙을 쌓아올린 토성과 주춧돌만 남은 건물의 유적이 있다. 계절마다 여행객이 많이 찾는데 그들이 유난스러운 역사의식이 있어서는 아니다. 항몽유적지 곳곳에는 계절마다 색색의 꽃밭이 펼쳐지는데 여행객들에게는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사진 촬영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쁜 풍경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 땅에 깃든 이야기를 멀게든 가깝게든 만난다. 고리타분한 역사의 흔적을 어떻게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려는 노력이 보기 좋다.


항몽유적지가 이렇게 변한 것이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는 강태영이 있었다. 계장님, 소장님, 선생님 등 여러 호칭으로 불렸던 그는 매번 항몽유적지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태면서 지금의 그곳을 설계했다. 해마다 이번에는 어느 밭에 어떤 꽃을 심을 지, 길 건너 예쁜 참빛살나무 숲을 항몽유적지 이름으로 구입해서 계속 유지할 수 없을 지, 포토존을 어떻게 만들어 사람들을 좀 더 불러모을 수 있을 지, 토성 둘레길을 둘러보는 답사코스를 좀 더 보강할 수 없을 지, 플리마켓을 유치해서 재미난 이벤트를 만들 수 없을 지, 항몽유적지를 좀 더 잘 보여주는 사진을 어떻게 찍을 지,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이 땅에 깃든 정신을 더 널리 알릴 수 있을 지 고민했다. 


항몽유적지 주차장에서 북쪽 바다 방향으로 내려가면 작고 낡은 창고 건물이 하나 있다. 언덕 정비사업을 진행할 때 본래 철거하려던 것을 살렸다. 그리고 간단히 정비한 후 내외부에 항몽의 느낌을 전하는 글귀를 적었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섬 제주,

두려움과 희망은

늘 바다 너머서 밀려왔다.


그날 하늘은 파랗고 땅은 붉었다.

그리고 자당화는 고왔다.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오는 그 날의 풍경을 적은 글귀는 강태영이 지은 것이다.


그를 오래 알고 지낸 것은 아니다. 많이 만나거나 길게 함께 머문 것도 아니다. 프로젝트 제안 때문에 처음 만났고, 사진관에서 진행한 사진수업에 참여하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으러 나가고는 했다. 항몽유적지 산책 때 잠시 이야기 나누거나 그가 올리는 블로그 포스팅을 보면 대충 짐작은 된다. 그는 진심으로 일하는 사람이고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고 또 실력있는 사람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종종 뵙고 여러 가지는 배울 수 있겠다 싶었다. 


늦은 밤에 자려고 누웠다가 부고를 들었다. 오래 알고 지낸 것이 아니어서 어떤 상황인지 몰랐다. 예전부터 아프셨던 모양이다. 사진 수업 중반 이후에 입원하셨는데 얼른 나으셔서 다시 오시라고 통화했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한참 뒤 항몽유적지 행사장에서 만났는데 많이 수척하셨다. 말랐기는 해도 어떻든 병원 생활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시는 모양이다 싶었는데.


컴퓨터를 뒤져서 외부촬영 수업 때 무심코 찍어두었던 사진 두 장을 찾았다. 작게 프린트해서 장례식장에 있는 가족에게 전했다. 선생님은 아프신 중에도 반치옥사진관의 사진수업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러셨구나.



세상을 조금 바꾼 또 한 분을 기록해 둔다.


강태영 선생, 돌아 가시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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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표정은 얼마나 간절한 말을 하고 싶었을까

모녀가 와서 사진을 찍고 갔다.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고 딸은 마흔이 가깝다고 했다. 늦은 오후 빛이 예뻤다. 마당에 배경천을 걸고 찍었는데 웃자란, 미처 자르지 못한 잡초가 썩 멋있는 바탕이 되었다.


마당에서 찍은 사진은 비교적 쉽게 골랐다. 예쁜 표정들이 많아서 그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것으로 정했다. 문제는 스튜디오 컷이었다. 흑백 사진  두 장을 열어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 있다. 그리고 한 장은 엄마가 웃고 딸은 그런 엄마를 지긋이 내려보고 있는 장면이다. 아, 어떻게 하나. 당장 보기에는 함께 웃는 사진이 좋을 것 같은데 두 번째 사진에서 좀처럼 손을 못 떼겠다. 


욕심대로 하기로 한다. 첫 장은 컴퓨터 속에 묻어두기로 한다. 사진 속에 어떤 표정은, 평소 말로 하지 못 했던, 드러내지 못 했던 감정이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 표정은 드러내지 못 해도 얼마나 간절한 말을 하고 싶어했을까 싶다. 


나는, 당신의 저 표정을 꼭 전해주고 싶다.


사진은 초상권 때문에 올리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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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옮겨쓰려다가, 찍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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