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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대세다
영상은 대세다. 아무래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이 생겨서, 하긴 해야 할 모양이다. 일은 결국 장비가 하는 거니까 이리저리 알아보는데 이게 또 한짐이네. 이걸 언제 또 마련하며 언제 또 배우고 익히나. 죽는 순간까지 무엇이든 계속 배우겠지만, 한 영역에서 깊게 배워가는 것은 그나마 차분하게 하겠는데 또 새로운 영역을 배워야 하니 범위는 넓어지고 깊이는 썩 얕을 것 같아서 걱정이다. 돈을 받고 하는 작업이니까 하려면 좀 잘 해야 할텐데, 지금 내 사진 수준에 비추어 보아서 그 정도까지 영상으로 해내려면 앞이 막막하다. 우선 파이널컷부터 깔아서 유투브 영상강의를 따라가며 하나씩 해 본다.
영상은 이미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사진과 닮은 것 같지만 문법구조는 다르다. 시와 소설의 차이 비슷할 것 같다. 사진은 백지 가운데 점 하나를 찍어놓고 보는 사람 마음대로 선을 확장시켜 가라는 방식이라면 영상은 아무래도 선을 그려주는 것 같다.
자, 다음 장비는 뭘 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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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책부터 본다.
일이 안 풀릴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게 좋다. 작업실에 앉아 있는데 좀처럼 되는 일이 없으면 마당으로 나온다. 겨울에는 장작을 해야 하니까 더 좋다. 체인톱으로 큰 나무토막을 썰고, 토막낸 나무는 다시 도끼로 가른다. 대충 10분만 넘겨도 이마에 제법 땀이 맺히고, 잡생각도 안 난다. 다행히 주변에서 나무 가져가라는 곳도 있어서 올 겨울은 어떻게 지날 모양이다.
된다면, 이번 겨울에는 나무요트 모형을 몇 개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요트라고 할 것도 없고 그저 바닷가에 널린 나무토막에 막대기 하나를 수직으로 세우고, 천을 적당히 잘라서 돛 모양으로 매달면 된다. 본래 바다를 떠돌던 유목이니까 썩 어울리는 자리다. 만들어서 프레임 안에 넣으면 작업실 공중에 매달아야지.
만들겠다고 했던 사진관 잡지를 만들었다. 처음 계획은 제주에 여기저기 있는 독립서점에 보내서 팔아 볼 작정이었는데 조용히 숨겨두고 있다. 사진이나 글은 대충 되겠는데, 이번 첫호 편집은 망쳤다. 가제본이라도 해봤어야 하는데, 대충 되겠지 싶어 바로 인쇄 보낸 것이 패착이다. 혼자 다 하려니 많이 서툴렀다. 조금 더 잘 만들어서, 다음호부터 공개해야겠다.
죽음에 대해 읽고 있다. 도서관에 가니 생각보다 죽음을 주제로 삼은 책이 많다. 사진관은 영정사진파티를 준비중인데, 하려고 보니 뭐든 알아야할 것 같아서 우선 책부터 본다.
책 읽기 방법을 바꾼다. 이제 읽고 나면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인상적이었다는 감상 정도만 겨우 남는다. 그것도 오래 안 간다. 그래서 읽으면서 메모한 것들을 그대로 옮겨 두려고 한다. 그대로 옮겨둘 메모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적으려고 한다.
'니가가라 상하이' 원고를 다시 시작한다. 인스타에서 가끔 보는 계정 중에 인스타를 일기장처럼 쓰는 사람이 있다. 차분하게 쓰는 문장도 좋지만, 매일 꾸준히 그렇게 적는다는 게 참 좋고 부럽다. 무엇이든 써서 만들겠다는 욕심은 오래된 것이니까, 늦었다고 후회하기 전에 이제라도 다시 손에 쥔다. 우선 손현아 이야기를 먼저 적는다. 지난 번 출장길에 만나고 왔다. 먼저 쓰고, 다음 출장 때는 다른 사람을 소개 받아서 또 적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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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겠다고, 죽을 듯이 먹는다.
폭식. 짐승이든 사람이든 오래 굶주리면 폭식하는 습관이 생긴다고 한다. 언제 다시 먹을 지 알 수 없으니까, 일단 먹거리가 생기면 최대한 입 속에 밀어 넣는다. 살겠다고, 죽을 듯이 먹는다. 얼만큼 소화시킬 수 있을까, 계산 따위는 사치다. 우선 담아 넣어야 한다. 그러면 몸은 냉정하게 딱 가능한 만큼을 소화시키고 나머지는 내친다. 배탈이다.
11, 12월 촬영은 마감이다. 오는 촬영을 막지는 않겠지만, 조바심 내며 일거리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겠다. 이런저런 프로젝트가 이어져서 다 해내려면 많이 바쁘겠다.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고 글도 쓰고 디자인 작업도 해야 한다. 내 몸과 실력과 시간이 얼만큼 감당할 수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내 시간과 기술을 현장에서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딱 몸을 움직인 만큼 번다. 가만 있으면 아무도 돈을 안 준다. 그래서 앞뒤 안 가리고 촬영 스케줄만 비어 있으면 오는 대로 일을 받았다. 후반 편집작업이나 원고 작업 시간 같은 것들은 일정에 안 넣었다. 안 되면 밤새서 해내면 된다 싶었다.
어제 종일 촬영을 마치고, 오늘 오전 미팅을 마치고, 오후에 잠시 눕는다는 게 저녁이 가까워서야 일어났다. 또 졸린다. 몸이 버거운 모양이다. 그리고 오늘 하겠다고 적어둔 일거리들은 하나도 못 한 채로 수첩에 고스란히 남았다.
행동은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이어지면 태도가 된다. 폭식하는 습관을 들인 것들은 상황이 개선되어도 좀처럼 먹는 방식을 고치기 어렵다. 일거리 앞에 조급하고 무엇이든 수주하고 보겠다는 절박함은 이제 태도가 되어버렸다. 어떤 작업이든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작가적 완성도의 문제가 아니라 다음 작업을 받아내야 한다는 일용노동자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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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목소리에게 나는 질문 하나라도 던질 수 있을까
마감해야 하는 작업 여럿이 앞길을 막고 있다. 덕분에 물에 들어가는 것도 낚시하는 것도 산에 가는 것도 요트 수업 가는 것도 미루고 있다. 닥친 마감 중에 독촉 연락을 받은 사진 작업을 마치니까 새벽 세 시가 넘었다. 유튜브로 이런 저런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하다가 마지막 두어 시간은 최백호를 들었다.
최백호의 노래는 주저하는 마음이 부르는 것 같다. 내가 과연 이 마음을 말해도 되는 것일까, 내가 과연 이 뜻을 전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정말 세상을 이만큼 안다고 해도 될까. 가수는 노래하는 동안 끊임없이 되묻는 것 같다. 그리고 확신이 아닌 조심스러운 허락으로 마침내 소리를 툭, 뱉어내는 것 같다. 속으로 되묻고 그 답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내뱉는 그의 소리는 그래서 음보다 조금 느리게 따라붙는 것 같다. 저런 얼굴을 내 카메라 앞에 세울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서 무엇을 찍어낼 수 있을까. 평생을 대답 앞에서 물러서고 물러서며 겸손하게 다시 물어온 저 목소리에게 나는 질문 하나라도 던질 수 있을까.
전인권도 있다. 사자머리 가수의 소리는 그가 세상과 통하는 좁고 유일한 통로이거나 그가 골방 안에서 바깥을 보는 작은 창문 같다. 그에게서 소리를 지운다면 그는 사라져버릴 거다. 세상과 잇는 위태로운 줄 하나만 겨우 붙들고 있는 예술가다. 무엇이든 잘 하는 엔터테이너 예술가의 시대에, 그는 참 귀하다. 예술가에게 기대하는 간절함이 오롯이 담긴 소리를 내지르는 사람이다.
탐나는 모델 두 목소리를 들어서 괜히 사진 작업 속도는 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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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가신 게 10년 전 일이란다. 그때 중국 매체도 여러 이야기를 다뤘다. 몇 달이나 지났을까, 길 가다가 중국잡지 낡은 포스터가 막 떨어져 나갈 참이었다. 가판대 주인에게 부탁해서 포스터를 얻었다. 몇 번의 이사와 귀국까지 갖고 왔다.
노무현, 스스로 사형을 선고하다.
잡지는 그렇게 적었다.
드물지 않게 노무현을 떠올린다. 잘 되어가는 정치와 사회를 보면 고마워서 생각나고, 나쁜 정치와 속임수의 행태를 보면 너희 때문에 대통령이 가셨다 싶어서 또 생각난다.
무슨 말을 보탤까. 같은 시대를 살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덕분에, 지금 바르고 강한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세상이 좋아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참 많이 고마워해요.
우리 대통령. 시대를 옮긴 거인. 다시 못 만날 사람.
그 빚을 마음 속에 지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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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 추락하다
드론, 추락하다
서귀포 사진이 몇 장 필요하게 생겼다. 새벽부터 장비를 챙겨 한라산을 넘어 왔다. 차 타고. 솔오름 전망대 도착 시간은 아직 해도 뜨기 전이다. 해 뜨기를 기다려 다시 봐도, 이 빛이 아니네. 아침 빛에 여긴 쓸 수 없구나. 차를 몰아 정방폭포 주차장으로 간다. 여기서는 서귀포항과 섶섬, 문섬까지 찍을 수 있다. 오늘은 카메라보다 드론이다. 자, 준비하시고, 날리세요.
아차, 메모리가 없다.
몇 년에 한 번씩 꼭 벌어지는 실수다. 매번 신경쓴다고 해도 꼭 방심하는 한 때가 있다. 그게 대충 몇 년 주기다. 캐시메모리에 저장한다고 해도 답이 안 나온다. 날 밝기를 기다려 아무 거나 작은 용량으로 하나 사서 끼울까? 또 아차, 드론 베터리 충전기도 안 가져왔다. 베터리 두 개 중에 하나는 새벽에 이미 다 썼고, 남은 하나라고 해 봐야 고작 30분쯤 날리면 방전될 텐데. 안 된다. 결국 다시 산을 넘어 왕복 두 시간을 다녀오기로 한다.
집에 도착하니 아직 아침 시간이다. 아들은 일어나서 내복 차림으로 밥을 먹고, 아내는 벌써 새벽 텃밭 일을 한참 마쳤다. 새벽에 쓴 베터리를 충전기에 걸고, 메모리를 챙긴다. 전기자동차 베터리도 잠시지만 충전기에 걸어둔다.
심기일전. 다시 산을 넘어 도착한 고근산. 산 정상 바로 아래까지 도로라더니. 나는 몇 발짝이면 될 줄 알았다. 아니네. 나는 왜 구두를 신고 왔을까.
어쨌든 정상. 고근산은 가운데가 움푹 파인, 전형적인 제주 오름의 형태. 산이라고 이름 붙어 있지만. 드론을 날린다. 한라산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니까, 드론은 북동쪽으로 뜬다. 빛이 예쁘지 않다. 엇갈린 방향. 오늘 아침에 찍었어야 한다. 어쨌든 아쉬운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 잠시 딴 곳을 봤던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던가. 갑자기 모니터에 뜨는 마이너스 고도 알림. 뭐, 산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고 얼른 고도를 올리려는데, 덜컹. 화면이 흔들린다. 그리고 이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나뭇가지. 아, 추락이다.
다시 떠라. 제발 떠라 드론.
화면은 고정됐고, 움직이지 않는다. 추락이다. 다행인 것은 흔들리는 화면이 오래 가지 않았으니 아마도 나뭇가지에 걸려서 바닥까지 떨어지지는 않은 듯하다.
대충 드론이 날아오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이는 것은 없다. 기척도 없다. 얼른 벗어 놓은 카메라를 메고 드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저 숲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작은 분화구의 남서쪽이고 드론은 분화구를 가로질러 동쪽 어디쯤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돌아오는 중에 부딪쳤으니 아마도 산사면의 오르막 어디에 있을 것이다. 화면에는 아직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 한손에 조종기를 들고 곧장 분화구를 가로질러 뛴다. 길은 없었다. 덤불과 가시가 몸에 엉켰다.
다행히 멀지 않았다. 화면을 보며 방향을 수정하며 5분쯤 걸었다. 작은 등산로 근처였다. 자, 화면에 뜬다. 드론은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다.
급하게 하지 말자 혼자 다독이며 우선 근처에 짐을 내렸다. 외투를 벗고, 장갑을 꼈다. 그리고 반경 10미터를 다 뒤진다고 생각하고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 꼭대기 어디 걸렸을 거야. 딱 보일 거야. 그 흰 덩치가 이 초록의 숲에 있으니까 바로 보일 거야.
크게 두 바퀴를 돌았지만 울창한 숲 어디에도 드론은 없다.
아, 없다.
굵은 나무 한 그루를 타고 중간까지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없다. 없다.
이건 사막에서 모래 찾기다. 계속 붙들고 있다는 건 무모하다. 머리가 자꾸 설득한다.
자, 상황을 수습해야지.
촬영은 마감이 급하니까,
우선 어떻게든 드론을 빌려서 내일 마저 찍자.
드론은 필요하니까 새 드론은 할부로 주문해야 하나. 돈 나올 구석이 없는데.
새 기종으로 바꿔야 하나? 그러면 지금 있는 조정기와 여분 베터리가 갈 데가 없는데.
어쨌든 찍어야 된다. 모레쯤 마감시킨다고 보면 내일 하루는 있다. 오늘 얼른 돌아가서 드론을 빌리러 가 보자. 안 빌려주면?
온갖 생각이 정신 없다.
다시 숲길로 나와 이리 저리 둘러본다. 조종기 화면에는 이미 ‘기체연결 끊김’메시지. 이제 어떡하나.
우왕좌왕하는데, 휭.
작은 바람이 분다. 휭.
아, 휭.
뭐지? 휭.
멈춰서 가만 들어보자. 작지만 분명히 난다. 저 소리, 드론 모터 돌아가는 소리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드론은 없다. 잘 못 들었나. 근처에 고장난 안테나라도 있나. 내 이어폰에서 신호간섭이라도 있나. 휭.
혹시나 싶어 이리 저리 돌아보는데 딱 한 자리. 분명히 여기 한 자리에서만 소리가 난다. 아무리 봐도 아무 것도 안 보이지만, 분명히 이 자리에서 소리가 난다. 정확하게 드론이 있다고 지도에 표시된 그 자리다.
아! 있다. 저기 있다. 저기 저 위에 빨간 불빛 있다. 드론 꼬리 불빛. 그 옆에 나뭇가지랑 다른 모양도 조금 보인다. 아, 저 솔잎 뭉치 안에 저기! 지도는 정확했다. 반경 10미터를 뒤진다는 내 각오를 비웃듯이, 드론은 1미터 오차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몰랐을 뿐.
소리가 아니었다면 절대 볼 수 없는 모양으로, 저 높은 곳에 드론이 매달려 있다. 됐다. 보았으니 됐다.
이제 꺼내러 가자. 이럴 때 쓰려고 10년 넘게 클라이밍을 배웠다. 신발끈 묶고, 둥치에 난 가지를 이리 저리 잡아가며, 혹시 부러질 지 모르니까 체중을 잘 나눠 실어야 한다. 나는 왜 구두를 신고 왔을까. 나무는 높았다. 높으면 뭐? 드론이 저기 있는데. 드론은 다행이 날개 하나 부러진 게 없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잎과 엉켜서 걸려 있었다. 꺼내서, 무사히 땅으로 내려왔다.
긴장이 풀리고 다리가 떨렸다. 날아다니는 녀석이니까 언젠가 떨어질 수 밖에 없겠지만, 지금은 안 된다. 클라이언트는 마감을 재촉하고 있고, 다시 살 돈도 시간도 없다. 지금은 안 된다.
운이 좋았다. 추락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드론이 무사히 돌아오기 위한 모든 조건이 좋았다. 추락지점이 멀지 않았고, 접근하기 어려운 바다나 절벽도 아니었다. 나무에 잘 걸린 덕분에 망가지지도 않았고, 추락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위치가 표시되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추락위치를 파악하는 기능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높은 곳에 걸린 드론을 갖고 오는 건 다행히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새벽 메모리를 놓고 온 일부터 추락까지. 아내는 오늘 별로 안 좋다며 일찍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클라이언트의 독촉이 있다. 초록 풀즙을 뒤집어쓴 녀석을 갖고 내려와서 다시 시동을 건다. 날아라 드론, 밥값 벌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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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이미 떠버렸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구엄포구까지는 차를 타면 10분쯤 걸린다. 한라산을 대각선으로 넘어 남쪽바다까지는 보통 한 시간쯤 걸린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서 공천포구로 왔다. 제법 일찍 출발했는데 오는 동안 해는 수평선 너머로 떠올랐다. 계절이 바뀌면서 새벽이 빨리 온다. 딱히 일출을 찍어얄 것도 없었다지만 해는 벌써 떠버렸고, 오전 내내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면서 사진 한 장만 건지면 되니까 재촉할 것도 없다. 따뜻한 차 안에 앉아서 점점 높아지는 해 보면서 메모장을 연다.
계간지의 표지사진을 의뢰받았다. 이런 종류의 사진은 어렵다. 나는 상업사진가인데, 상업사진은 대부분의 경우 클라이언트와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분명하다. 찍어야하는 대상과 구사해야 하는 기술의 내용이 뚜렷하다. 그런데 이번 작업은 무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를 찍어서 클라이언트의 기대치를 넘는 동시에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붙잡아야 한다. 이쯤되면 주관식 문제 중에서도 특히 질문은 짧은데 답은 길게 써야될 것 같은 문제쯤 된다. 게다가 나는 풍경사진에 내세울 것도 없는데. 이 답 안 나오는 문제지를 받아들고 어디든 가서 뭐든 해봐야 하니까, 공천포 바다에 있다.
몇 번 그런 경험이 있다. 클라이언트와 에이전시, 스탭들까지 열댓 명이 스튜디오에 들어차서 모두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는데 좀처럼 사진은 안 나올 때, 문 닫힌 스튜디오에는 도망칠 구멍도 없다. 그럴 때는 괜히 조명을 이리저리 옮겨보면서 혼자 속으로 고함을 친다.
괜찮다. 시간은 어쨌든 간다. 어떻게든 끝은 난다.
그런 생각으로 버티고는 했다. 그런 때에 비한다면야 이 정도 부담감은 껌이다. 옆에서 미심쩍은 눈빛으로 지켜보는 클라이언트가 있길 하나 당장 두 시간 후에 마감이길 하나. 아직 시간도 있고, 발품만큼 사진이 나올 거라는 믿음도 있다. 그리고 나는 주말 이 아침에 벌써 산 너머 바다에 와 있지 않나. 어제 새벽은 중문으로 가서 찍었고 오늘은 여기 남동쪽을 걷는다. 아직 며칠 여유가 있으니 몇 번은 더 와서 어딨는 지 모르는 한 장을 찾아다닐 작정이다. 일을 핑계 삼아 한가롭다. 문장이든 사진이든, 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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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을 자리가 저긴데
오후에 집 아래 구엄포구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에 다녀왔다. 본래 아내가 나가는데 오늘은 마침 3.1절이고, 마루는 어린이집을 안 가고, 그러면 아내가 플리마켓을 가는 동안 내가 마루를 살펴야 하고, 마루를 살피는 것보다는 플리마켓이 편할 것 같아서 대뜸 내가 가겠노라고 나섰다.
새로 만든 상품이 없으니까 이제는 상품성이 다해 가는 엽서와 책갈피 등을 챙겼다. 포구에 도착해서 자리를 배정받고, 테이블을 펼치고 가져온 것들을 정돈했다.
손님은 많았는데 우리 엽서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빛은 따가워서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얼굴이 다 탔다. 오랜만에 가져간 책을 펼쳐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물건이 안 팔리니까 책도 안 읽히고 시간도 안 갔다. 내가 앉은 뒤편으로 바다가 펼쳐 있고 그 너머에는 구엄방파제가 있다. 방파제 끝에는 언제나처럼 낚시하는 사람들이 몇몇 섰다. 뭐가 얼마나 잡히는 지는 몰라도, 저기 서 있는 게 어딘가. 내가 있을 자리가 저긴데. 여기가 아닌데. 오후 내내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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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가지런하기 어렵다.
지난 겨울 동안 썼던 장작이 바닥을 드러냈다. 작업실 공간 전체를 데우려니 나무 한 짐 타는 게 금방이다. 마당에 널려있던 목재 팔레트 몇 개를 모아놓고 직쏘로 끊어낸 다음 기계톱으로 썰었다. 썰어 낸 장작이 한쪽에 무더기로 쌓였다.
장작이라면 마땅히 마당 한 켠이나 집 벽 바깥쪽에 가지런히 높게 쌓여야 한다. 온갖 이미지 속에서 내가 본 장작이 모두 그랬으니까. 그러나 막상 만들어 보니 어디 가서 돈 주고 사 오는 장작이 아닌 이상 좀처럼 가지런하기 어렵다. 우선 구해 오는 나무가 목재 팔레트부터 공사장 자투리 나무,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나무들까지 출신 성분이 다양하다. 생긴 것이 다르고 붙은 모양이 제각각이라 대충 난로 입구에 걸리지 않을 크기로 자르면 그만이다. 이리 저리 박힌 못은 하나하나 뽑는 것보다 태운 후에 못만 따로 걷어내는 것이 빠르다는 걸 알게 됐다. 각진 나무, 둥근 나무, 구부러진 나무, 못 박힌 나무들을 어떻게 쌓아봐도 차곡차곡이 안 된다. 어지러운 날들이 정신 없이 쌓인 한 달, 일 년이 꼭 저럴까 싶다.
매일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과로 움직였다던,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의 산책 시간을 보며 시계를 맞췄다던 철학자를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터 였나 그럴 수도 있었겠다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같아서는 공감을 넘어 부럽기도 하다. 무언가 집중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끊어내야 비로소 가능한 삶의 형태같기 때문이다.
산 속이나 신의 전당에 들어가 사는 수도자의 삶이 아닌 이상, 일상이 가지런하기는 어렵다. 잘 정돈된 삶은 돈 주고 사다쓰는 장작 같아서, 비슷해 보이는 삶도 들여다 보면 아무렇게나 쌓아 둔 장작더미 같을 거다. 한 사람의 일이, 하루의 사건이 키 맞춰 자른 나무토막처럼 열 맞춰 오지는 않는다.
괜찮다. 조금 엉클어져도 삐딱거리면서 간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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