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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되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꼭 한 달이 되는 날이다. 내게는 중요한 작은 성취니까, 기록해 두자. 

왼쪽 팔꿈치와 오른쪽 어깨가 아픈 지는 오래 됐다. 각각 테이스엘보, 회전근개파열 가능성 진단을 받았다. 왼쪽 무릎도 조금씩 이상해지려고 했다. 엘보는 거의 3, 4년쯤 된 것 같고, 어깨도 2년쯤 됐다. 최근에는 특히 어깨가 심하게 아팠다. 잠잘 때도 아파서 오른쪽으로 돌아눕기가 어려웠고, 아침에 일어날 때도 팔을 딛기 어려워서 몸을 빙글 돌려 일어나고는 했다. 일상 생활 중에도 통증 때문에 지장이 많았고, 특히 출장 촬영 때 조명 장비를 들어야할 때는 문제가 컸다. 여러 개인병원을 다니며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지만, 비슷한 진단에 서로 다른 처방을 주었고 그때만 잠시 낫는 듯하다가 조금 지나면 다시 돌아왔다. 

그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보다. 이제 더 이상은 예전처럼 일하기 어렵겠다. 근력을 조금 덜 쓰고 일하고, 몸을 조금 덜 움직이고 돈을 버는 방법을 고민해야겠다. 클라이밍도 이제 다시는 못 하겠구나. 몸은 어떻게든 알아서 방법을 찾겠지. 아픈 부분을 조금 덜 쓰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겠지. 

대충 그렇게 생각하면 됐지만 어쩐지 조금 서글펐다. 요령도 생겼다. 두 팔의 아픈 부위는 달랐으니까,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동작은 오른팔을 쓰고, 어깨에 부담이 가는 동작은 왼팔을 쓰는 식이었다. 미봉책.

그러던 중에, 여름 포구에서 다이빙을 하며 놀던 날이었다. 제법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는데 오른쪽 어깨가 깨질 듯이 아팠다. 순간적으로 팔이 수면을 치면서 저항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 큰일났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 필요하면 수술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지인에게 병원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MRI를 찍었다. 그 전에도 mri가 정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초음파를 통해서 보아도 회전근개 문제라고 하고 증상도 꼭 회전근개 문제였기 때문에 그에 맞는 치료를 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의사는 내 mri를 본 후, 회전근개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 부위에 염증소견이 조금 있고, 약간 붓기는 했지만 회전근개 근육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달랑 진통소염제 처방을 했다. 한 알이다. 한 번에 한 알씩, 하루에 두 번. 정말로 이걸로 되나?

저, 그럼 운동해도 되나요?
네, 뭐 근육은 문제가 없으니까, 하실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해도 됩니다.

해도 된다. 그래서 시작한 운동이 오늘로 딱 한 달이다. 농담처럼, 받아서 태어난 체력은 다 썼다. 이제는 만들어 써야 하는 나이다.라고 주변에 말한다. 나는 암벽 운동을 멈춘 뒤로 딱히 운동이라고 한 게 없다. 가끔 카약을 타고 자전거를 타지만 그때뿐이지.

작정하고 근력운동을 시작했다. 시간을 길게 잡으면 부담스러우니까, 짧게 하는 대신 강도를 높였다. 하루에 15분씩 상체와 하체를 번갈아 했다. 며칠 하고 조금 익숙해진 뒤에는 운동을 조금씩 추가해서 지금은 30분쯤 한다. 한 달 동안 딱 하루를 걸렀는데 그날은 새벽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한라산을 걸었던 날이니까 예외로 해도 괜찮다. 결과는 생각보다 금방 나타났다.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은 체력이다. 하루를 좀 더 밀어부칠 수 있는 체력이 생기니까 생산적인 에너지가 따라왔다. 하고 싶었고 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시도했다. 아플 조짐이 보이던 무릎은 어떤 통증의 기미도 없다. 왼쪽 팔꿈치도 많이 회복됐다. 오른쪽 어깨는 여전히 통증이 남아있지만 적어도 필요한 때 필요한 힘을 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중량을 들고 돌리고 몸을 끌어올리는 모든 운동 동작에서 어깨는 아무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다. 다시는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육체적 시도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겨우 한 달만에.

요즘 내 일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한다. 일어나서 물 한 잔 마시고 곧장 글을 쓰기 시작한다. 6시까지 글을 쓰고, 운동을 시작해서 마치고 샤워까지 하면 7시다. 아침을 먹고 이런저런 업무를 처리하다가 11시가 되면 낮잠을 잔다. 1시간 조금 안 되게 자고 일어나서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일상.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11시 전에 잠든다.

겨우 한 달이다. 지난 경험에 비추어 보면, 대부분의 운동이나 경험이 몸에 익는 데는 석 달쯤 걸렸던 것 같다. 최소한 석 달은 해야 몸이 조금 적응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직 두 달은 더 긴장속에 운동해야 하고, 이제 겨우 열흘쯤 된 글쓰기는 앞으로 석 달을 더 지속해봐야 몸에 겨우 익을 것이다. 

작은데 단단한 성취가 이토록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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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니까 아무 말이나.

졸린데, 사진 카피하는 동안 잠시만.

 

며칠 동안 드문드문 이어졌던 영상 촬영이 오늘로 끝났다. 별 것 없는 동네사진관 사진가 한 명을 위해서 여러 스탭이 고생해주었다. 오늘은 조환진 선생을 찾아가 돌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진찍는 장면, 공천포 바닷가에서 카페지니의 최유진 대표를 모델로 풍경사진같은 인물사진을 찍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제 요청받은 사진 몇 장을 전해주면 내 일은 끝난다. 내가 하는 작업, 내가 생각하는 사진에 대해 말했는데 아직 서툰 생각들이지만 단어를 써서 문장으로 구축하다 보니 괜히 커졌다. 가진 것보다 너무 좋게 보여질까봐 겁난다. 빈 것을 아닌 척한 것은 아닌가 싶어서.

 

졸리니까 아무 말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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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크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연하게, 한 명의 사진가로 방송에 소개된다. 미팅을 하고, 일정을 잡고, 촬영팀이 와서 몇 번에 나누어 내 사진작업과 생활과 생각에 대해 묻고 찍는다. 평소의 생각, 평소의 작업을 보여준다고 마음 먹었지만 촬영이 이어질 수록 불안한 마음이 커진다. 나는 한낱 작은 사진관의 사진가이고 겨우 말하려는 것을 서툰 작업으로 내보이는 것이 고작인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크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찍는 사진보다 너무 대단하게 보여주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은데, 말과 행동은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오면 어쩌나 싶다. 행동하는 나와 지켜보는 나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일이 나는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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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드러나고 기만은 물러가라.

마루는 열 살이다. 아침에 깰 때마다 아이를 바라본다. 같이 아침을 먹고, 학교까지 가는 3분 남짓한 길을 손잡고 걷는다. 걸으면서 매번 말해준다. “아빠가 마루 손잡고 학교 가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알지?” 마루의 대답은 간결하다. “네!” 횡단보도까지 바래다준 후에는 “인사 잘 하고, 오늘도 멋진 하루를 보내.” 인사한다. 마루는 또 “네!” 하고 학교로 뛰어간다. 

요즘은 매일 태권도를 다녀서 5시를 조금 넘겨 집에 온다. 씻고, 게임하고, 저녁먹고, 영상보고, 아내가 읽어주는 책을 듣는 것이 마루의 일상이다. 대부분 셋이 같이 잠드는데, 어쩌다가 마루가 먼저 잠드는 날이면 아내와 조용히 아이 옆에서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본다. 어쩌면 저렇게 예쁜지 감탄하면서.

그렇게 자란 아이가, 날마다 나를 조금씩 닮아가는 아이가 열 살이다.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힘들까. 그게 만약 당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부당하게 당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생각한다. 하물며 목숨이야,

그런 아이들이 침몰하는 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 하고 죽은 것이 8년 전이다. 죽음을 예감한 아이들이 학생증을 꺼내 목에 걸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내는 울었다. 다시, 그날이다. 감당하기 벅찬 어려움이 닥쳤을 때 마루는 아빠엄마를 찾는다. 언제 어디에 있든 내가 찾으면 아빠엄마가 나타나서 나를 구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마루에게는 있다. 세상 대부분의 아이들은 비슷한 확신을 갖는다. 답을 주지 않더라고, 언제든 부모가 옆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모든 부모는 그런 아이들의 기대에 기꺼이 부응한다는 각오가 있다. 

무슨 말을 더 하랴. 그 아이들을 가슴에 묻고 여전히 한을 품고 사는 그 부모님들이 너무 마음 아프다. 온몸과 마음으로 아빠엄마를 찾았을 때 그 부름에 대답해주지 못 했다는 그 한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이 크고 깊은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그 원통함은 조롱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들이 죽은 아이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마음에 내려놓을 수 있도록, 비밀은 드러나고 기만은 물러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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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데우스

호모데우스
210204-220402

32 좋은 통찰.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 되면서 전쟁의 채산성이 떨어졌고
38 우리사진의 힘에 내재된 위험들
40 죽음의 최후 체호프의 법칙
44 죽음의 평등이 깨진다
51 행복
74 신성을 획득하기
87 죽음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사진으로 소화하는 법은?
106 인류의 시대
117 그렇다면, 육종에 길들여진, 스트레스 받지 않는 동물의 종도 탄생할까?
118 유전자의 선택과 저항
122 알고리즘
126 감각과 감정이라는 알고리즘
132 잔디밭에서 바비큐를 먹으며 축일을 기념하는 현대 유대교 가정
134 신과 인간의 약속. 나머지를 배경으로 만드는
138 수렵시대-동물들의 욕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생존과 직결. 그래서 애니미즘이 자연스럽게. 농경-신과 인간의 1:1 만남. 그래서 성경, 길가메시 서사 등은 농경시대의 산물
140 과학혁명은 신도 침묵시켰다
159 의식의 진화적 이점
172 튜링테스트
187 호모사피엔스의 지구정복-여럿이 소통하는 능력. 집단지성
203 상상의 질서에 대한 믿음
246 고통을 느끼지 않는 허구. 허구도 중요하다. 그러나 허구는 도구다. 도구를 위해 피흘리지 마라.
277 근대의 계약.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데 동의한다.
279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288 경제 성장은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 줄까?
290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과학의 땅에서 종교의 땅으로 건너왔다.
295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지를 발견한 것
326 중세유럽 지식=성경*논리 / 과학혁명 지식=경험적 데이터 * 수학 / 인본주의 지식 = 경험 * 감수성
331 인본주의는 삶을 경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무지에서 계몽으로 가는 점진적인 내적변화 과정으로 본다.
3332 중세의 주인공은 내적 변화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346 민주적 투표는 기본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를 해결하는 방법
362 양차 세계대전은 종교전쟁
369 1914-2014 백년 동안 이데올로기의 부침
379 전통종교가 장초적 힘을 가졌던 시대
435 남는 인간은 뭘 하나?
451 21세기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외부 알고리즘이 있을 것
459 구글 기준선 연구 - 완벽하게 건강한 인간의 유전자 프로필
497 인간의 다운그레이드. 빠른 결정, 문제 해결은 그 사이의 고민과 의심의 지대를 지운다
509 중앙집중식 데이터 처리보다 분산식 데이터 처리가 더 효과적
529 경험은 공유되지 않으면 가치 없고, 우리는 자기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필요가 없다. 경험을 데이터로 전화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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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고 서럽고 무력한 날이다.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 밖은 어두운데 멀리서 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진 빚을 못 갚았다. 새벽에 대선 결과를 확인하고 잠이 안 와서 컴퓨터를 켜고 밀린 작업을 한다. 밀린 일만 열심히 생각하면 조금 괜찮을까 싶어서. 안타깝고 서럽고 무력한 날이다.

 

마루도 곧잘 이재명 대통령 이야기를 했다. 이제 아이가 잠에서 깨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재명이라는 이름 뒤에 붙는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떼어줘야겠다. 열살 아이에게 어떻게 알려주어야 할까. 권력의 폭력과 비밀스러운 부정이 만연할 것인데, 약한 것들을 짓밟고 다른 것들을 비웃는 것이 당연해 보일 텐데. 아이에게 해줄 말을 한 마디씩 생각하다가 가슴이 막힌다. 왜 정의로워야 하는지, 왜 혐오와 조롱의 시대 속에 물들면 안 되는지 나는 잘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워왔던 사람들이 이렇게 패배하는 장면을 앞에 두고, 나는 마루를 잘 설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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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Backstage

웃는 눈이 닮았다.

부녀가 다녀갔다. 사진관의 프로그램은 1시간 동안 1명을 찍으니까, 두 개 일정을 예약해서 진행했다. 딸은 이번에 대학원을 졸업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아빠와 제주 여행을 왔다. 여행은 아빠가 제안했고, 사진관 촬영은 딸이 정해서 예약했다. 아빠에게, 딸이 가장 닮지 말았으면 하는 자신의 모습과 꼭 닮았으면 하는 모습은 무엇인지 물었다. 딸은 아빠가 이야기한 두 가지가 자신에게 모두 있다며 잠깐 울었다.

 

딸이 찍는 동안 아빠는 마을을 산책했다. 딸의 마지막 사진이 모니터에 떠 있을 때 아빠는 돌아와서 "포토샵이 너무 과하네." 웃으며 말했다. 원본인데. 뭐, 인생은 어차피 조명빨. 여러 조명을 비췄으니 그리 보였을까.

 

딸을 내보내고 아빠를 찍었다. 올해 쉰이 되는 아빠는 제주살이를 준비중인데, 이곳에서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그 준비가 시작되면 설랠 것 같다고 했다.

 

커플이나, 부모자식간이나, 친구사이가 함께 예약하면 각자의 사진과 함께 둘이 함께 있는 사진도 찍어준다. 서비스다. 아빠와 딸은 웃는 눈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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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지옥 같은 날들이다.

개미지옥 같은 날들이다. 일어나서 일하고 밥먹고 일하고 잠드는 일상들이 뒤엉켰다. 늦게 잠들고 새벽에 깨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데 잠은 덜 깨서 몽롱한 눈은 절반쯤 겨우 뜨고 그 정신으로 꾸역꾸역 하루를 모니터만 보면서 지낸다. 방전된 체력 때문에 오후는 버티기 힘들고 저녁 먹고 그 에너지로 겨우 정신 좀 차리고 일하다 보면 새벽이다. 책상에는 며칠 작업으로 온갖 것들이 쌓여서 손 하나 더 댈 틈이 없고, 바닥에는 쓰레기들이 널렸다. 스튜디오에 세팅해 둔 조명은 며칠 째 그대로이고 촬영 때문에 들고 왔던 돌멩이들도 주인처럼 작업실 바닥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두 달을 기다려 겨우 받은 카약은 물에 들어가 보지도 못 했다. 창고 한 구석에서 한 달이 가까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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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끝을 보고 온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연말에 따져보니 2020년에는 책을 읽지 않았더라. 단 한 권도 안 읽었더라. 그래서 부랴부랴 올해는 책을 손이 들고 있기로 마음 먹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다. 오늘 마친 책은 시간에 대해 쓴 물리학자의 책이다. 별로 재밌지 않아서 제목은 안 적어야지. 작고 얇아서, 들고 다니면서 아무 때나 읽기 좋을 것 같아서 골랐다. 책 속에는 구입 영수증이 그대로 끼워져 있었는데 2019년 부산에서 산 책이고, 책갈피 끈이 책 중간쯤까지 가 있는 걸 보니 읽다가 말았던 모양이다. 시간을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했는데, 그러니까, 몇 개만 적어보면,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시간은 연속하지 않는다.

시간이 사라져도 사건이 남는다.

우리의 시간은 엔트로피의 증가 과정이다.

등등.

 

책의 저자는 훌륭한 물리학자라는데 훌륭한 해설자는 아닌 것 같다. 일반인이 교양서 개념으로 읽기에는 어려웠다. 단어는 알겠는데 문장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 많이 건너뛰며 읽고, 그럴듯한 문장만 골라 읽으며 이해되는 문장들만 연결해서 전체 이야기를 파악하려니 더 어려웠다. 반쯤 내려놓고, 대충 읽었다.

 

시간의 절대성이 허구일 수 있다는 말은 흥미로웠다. 영화 '컨텍트'에서 외계인들이 그들의 언어 속에서 시간은 일방적이지 않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책의 후반부로 가면 어설픈 철학자의 주장 같아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얼마 전에 읽은 책 평행우주.의 후반부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전개됐는데, 양자역학의 등장 이후 존재는 불확정.되고, 그 뿌연 가능성을 고정된 상태로 포착하는 것은 관찰자의 개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철학자와 시인들이 한참 전에 이야기한 '내가 너를 불렀을 때 꽃이 된' 이야기를 물리학자들이 하고 있는 사태인가 싶다. 숫자의 깔끔한 조합으로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마침표를 찍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물리학이 시를 쓰고 철학하려는 것인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 결론을 읽으려고 천문학 물리학 책을 찾아들지는 않았는데.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처럼, 읽는 동안 시간 참 안 갔다. 

 

우리 우주를 관통하는 공통의 언어는 수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양자물리학이 관찰자의 개입이 확률의 모호함을 끝장낼 수 있다는 말을 읽고 나니까, 어쩌면 수학이 공통의 언어일 수는 있어도 유일한 언어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길을 통해 지금 최신 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형태를 꽤나 닮은 모습으로 그려낸 선배들이 있었다. 떠오르는 사람은 석가모니. 아인슈타인의 일화 중에, 그의 사후 최신 연구실에 초대된 미망인 이야기가 있다. 미망인에게 최신 연구장비를 소개하며 이 장비가 얻어낸 놀라운 실험결과를 말하자, 미망인은 '내 남편은 냅킨 뒷면에 대충 적어가며 그 결과를 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슷한 결과를 석가모니는 나무 아래 6년 동안 앉아서 생각만으로 얻어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그의 언어로 이미 우주의 끝을 보고 온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아내가 요며칠 '책 읽어주는 앱'을 테스트 중이다. 들어봐서 괜찮으면 마루에게 들려주려는 모양이다. 여러 미디어의 시대에, 책 읽기가 여전히 사람을 성장시키는 강력한 방법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읽어나가는 행위가 능동적이기 때문일까 싶다. 졸린 눈을 비비며 계속 읽고, 모르면 다시 읽고, 멈추어 생각하는 것은 적극적인 행동이니까. 여타의 미디어가 가만히 있어도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에 반해 독서는 직접 읽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메모처럼 휘갈겨 두고, 그만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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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업사진가.

 

 

그럭저럭 사진으로 밥을 벌어먹고 산 것이 15년 정도 된다. 취미로 시작해서 열정의 단계도 있었고 절반쯤 발만 걸친 때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붙들고 있었던 때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15년. 이제 내가 상업사진가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내 사진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없고, 아마 계속 없을 것 같지만 붙들고 있었던 시간 만큼 알게 모르게 실력이라는 것도 쌓였다. 한 분야에서 고민하며 단련하며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갖게 되는 딱 그만큼의 실력이다. 더할 것도 없지만 덜할 것도 없는.

 

영상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니까, 영상 언어를 모르면 한 시대의 문맹이 될 것 같아서 얼마 전부터 영상을 연습하고 있다. 유튜브에는 기초부터 시작해서 온갖 고급 정보까지 다 있어서 하나씩 보며 따라하며 또 모르는 것을 찾아보면 더듬더듬 배워볼 만하다. 이러다가 영상으로 전업하나 싶다가도,

 

나는 직업사진가.라고 자각한다. 조금 더 나은 사진을 찍어야 해, 작년보다 올해 사진이 더 좋아야 돼, 할 수 있어, 혼잣말을 한다. 새로운 사진 스타일을 찾아보고, 리터칭 방법을 고민하고, 잠들기 전에 눈 감으면 새 컨셉을 생각한다. 잘 찍은 사진을 보면 괜히 샘나고 내 사진에 대한 갈증이 뒤따른다. 문제 앞에서 사진적인 해결방법을 떠올리게 되는 내가 반갑다. 영상의 언어를 배우지만 그 언어로 전하려는 내용은 사진에 대해서일 것 같다.

 

헤어와 메이크업, 스타일링을 작업해 줄 파트너가 있으면 좋겠지만 제주에서는, 게다가 이 외각에서는 쉽지 않다.

단 한 장의 사진에 시간과 물량을 투입해서 기가 막히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이해하는 클라이언트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도 어렵다.

손끝 하나까지 감정을 담고 카메라와 겨룰 수 있는 모델도 없다.

여러 한계가 있지만, 사진을 보는 사람은 카메라 너머 현장의 한계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 온라인의 시대에, 모든 직업사진가의 작업은 세계의 이미지와 경쟁하고 비교당한다. 그러니까, 숨을 수 있는 핑계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 확신은 생길 만큼의 시간을 고민하고 배우고 견디면서 왔다. 나는 직업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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